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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알파고가 두렵지 않은 이유 "나를 믿으니까""한 판이라도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담은 돼" (상하이=연합뉴스) 최인영 기자 = 인공지능의 최대 난제로 꼽히던 '바둑'을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현존 최강 바둑 기사인 이세돌(33) 9단에게 도전장을 내민 '알파고'(AlphaGo)의 당돌함에 세계가 놀랐다.이세돌 9단은 그 도전이 흥미롭기만 하다. 단번에 도전을 받아들인 그는 진다는 생각은 안 한다. 자기 자신을 향한 믿음에 힘이 솟는다.구글 딥마인드사(社)가 개발한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는 오는 9일부터 15일까지 5차례에 걸쳐 대국을 펼친다.그러나 현재 이세돌 9단은 다른 대국에 집중하고 있다. 4일 그는 제17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출전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머물고 있다. 3일 농심배 제12국을 마치고 상하이 시내 식당에서 만난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 대국을 앞두고 부담감보다는 기대감이 더 크다"라며 "아무래도 인공지능과 첫 대결이어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일 농심배 기자회견에서 "부담감은 농심배보다는 알파고 쪽에 더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일본 바둑의 1인자 이야마 유타 9단이 "이세돌 9단이 부담을 느낀다니 놀랍다"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이에 대해 이세돌 9단은 "여기서 느끼는 부담이란, 한 판이라도 지면 안 된다는 부담"이라고 설명했다.부담감을 느낀다는 말 역시도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그는 "이야마 9단도 알파고의 수준을 낮게 보기 때문에 그렇게 놀란 것"이라고 덧붙였다.이세돌 9단에게 알파고와 대국할 때 무엇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지를 묻자 "스코어로 보여주고 싶다"고 답했다. 5전 전승을 거두고 싶다는 의미다. 그는 앞서 알파고 대국에 관한 공식 기자회견에서 "(5번의 대국 중) 3대2 정도가 아니라 한 판을 지냐 마냐 정도가 될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에서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 CEO와 하이파이브하는 이세돌 9단(연합뉴스 자료사진)이번 대국이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세돌 9단이 '인류의 자존심'을 걸고 인공지능의 습격에 맞서는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퀴즈와 체스에서 인간을 이겼고, 고도의 사고력과 직관력을 요구하는 바둑을 정복하려고 한다.이세돌 9단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인류의 대표라는 사명감은 아직…"이라며 손사래를 쳤다.그런 비장한 각오보다는 일단 자신에 대한 믿음을 앞세워 세기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다.그는 알파고 대국을 앞두고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물론 '딸 바보'인 그는 캐나다에서 지대는 딸 혜림 양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오는 6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그는 알파고와 처음 대국하기 전까지 딸과 시간을 보내겠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알파고는 자기 혼자 상대해야 한다.알파고의 실력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지난해 10월 유럽 챔피언인 중국계 프로기사 판후이가 알파고에 0대 5로 졌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졌다. 이세돌 9단도 알파고와 판후이 간 대국 기보를 보고 알파고의 실력을 가늠하고 있다. 알파고는 슈퍼컴퓨터를 기반으로 방대한 바둑 정보를 짧은 시간에 습득하는 중인 반면, 이세돌 9단은 정보통신기술(ICT)과 많이 친한 편은 아니다.인터넷을 많이 이용하고 컴퓨터 바둑도 많이 두기는 하지만, 스마트폰은 롱텀에볼루션(LTE) 초창기 모델을 사용하고, 인터넷 뱅킹도 왠지 거부감이 들어 이용을 꺼린다. 이런 점이 문제되지는 않는다. 그는 "상대가 인공지능 알파고라는 의식은 하지 않고 한 수 한 수 승부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이어 "일단 알파고와 1국을 두면 모든 게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했다.이세돌 9단은 "알파고가 이번에 지고 재도전한다면 받아주겠다. 리턴매치는 얼마든지 환영"이라며 "그러나 그다음에 또 도전할 때는 잘 모르겠다. 알파고가 (나를 이기려고) 칼을 갈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그는 인공지능 바둑이 인간을 이기는 날이 온다는 전문가들의 전망에는 동의한다.이세돌 9단은 "언젠가는 컴퓨터가 인간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지금은 양보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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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하굿둑 조성 30년> 사라진 생태 ① 재첩'재첩국 사이오!' 부산의 새벽을 열던 재첩, 하굿둑 조성 최대 피해자 지금은 명맥만 유지…"물길 트면 몇년 내 복원 가능" <※편집자주 = 1987년 낙동강 하굿둑 조성으로 민물과 바닷물의 교류가 끊긴 지 올해로 30년을 맞습니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낙동강의 기수(汽水)지역은 생태계의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와 강이 단절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낙동강 재첩을 비롯해 수많은 기수역 어자원과 철새들이 자취를 감추거나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최근 서병수 부산시장이 낙동강 하굿둑을 완전 개방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기수역 생태 복원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라져간 낙동강 기수지역의 대표적인 어자원 등 사라진 생태를 찾아가는 탐방 시리즈를 7차례 송고합니다.> (부산=연합뉴스) 이종민 차근호 기자 = "발길에 밟히는 게 재첩이었어요. 발가락으로 꾹 집어 올리기도 하고, 얕은 물에서는 발을 한번 휘저으면 재첩이 새까맣게 드러났어요." 부산 사상구 모라동 재첩 거리에서 '할매재첩'을 운영하는 권영희(70·여) 씨의 말이다.그는 이곳에서 2대째 재첩국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과거 이 거리에는 낙동강에서 나는 재첩으로 재첩국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10여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3∼4곳만 명맥을 잇고 있다. '할매재첩'의 권영희씨가 뜨끈뜨끈한 재첩국을 주방에서 내놓고 있다.<차근호 기자>지금 이곳 식당에서 쓰는 재첩은 낙동강 재첩이 아니라 대부분 섬진강에서 가져온 재첩이거나 종패를 뿌려 키운 양식 재첩이다. 낙동강 하굿둑이 만들어진 이후 낙동강 자연산 재첩은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낙동강 하굿둑은 1987년 부산 사하구와 강서구를 잇는 길이 2천260m, 높이 18.7m, 10개 수문과 1개 갑문으로 만들어졌다. 1천573억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됐다. 낙동강으로 올라오는 염분을 막아 김해평야에 안정적인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마시는 물의 86%를 낙동강에 의존하는 부산 시민의 수돗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는 목적으로 조성됐다. 낙동강 하굿둑 낙동강 어귀 구포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김한배(66)씨는 "어린 시절 구포나루터에 재첩배가 1㎞가량 일렬로 빼곡히 정박해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말했다.그의 기억에 따르면 낙동강 구포교 아래 둔치에는 재첩 껍데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친구들과 강가에서 놀다가 재첩 한 바구니를 잡아 집에 들고가면 "쓸데없는 것을 왜 잡아왔느냐"고 타박할 정도였다. 그만큼 재첩이 많이 잡혔고,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었다.그러던 것이 하굿둑 조성 후 불과 2∼3년 사이에 재첩 배를 거의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민물과 바닷물의 소통이 끊기자 기수지역 물속은 이곳 생물들에게 말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변화를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은 재첩이었다. 김경철 '습지와 새들의 친구' 생태보전 국장은 "수질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패류"라며 "민물과 바닷물 속 갯벌에서 영양염류를 빨아먹는 재첩의 경우 물길이 바뀌면 곧바로 폐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둑 조성 후 몇 년 안에 낙동강 하류는 재첩의 무덤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낙동강 재첩은 캐는 족족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다. 정확한 통계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부산지역 경제활성화에 적지 않은 이바지를 했다. 낙동강 재첩은 다른 지역의 재첩과는 모양부터 사뭇 다르다.우선 크기에서 섬진강 등 다른 지역의 재첩은 자잘하지만, 낙동강 재첩은 엄지손가락 손톱만큼이나 큼직하다. 강과 바다가 끊긴 지 30년. 낙동강 재첩잡이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을까. 1월 중순 하굿둑 아래 부산 강서구 명지동 일대를 취재진이 찾았을 때 얕은 물에서 사람 2명이 한 조를 이뤄 재첩잡이 어구로 강바닥을 긁는 모습이 보였다.대나무 쪽을 꽂아 자신의 어장임을 표시해 둔 곳도 눈에 띄었다. 섬진강에서 가져온 재첩 종자를 뿌려서 양식을 하는 곳이라고 주민들이 귀띔했다.대나무가 꽂혀 있는 곳이 재첩 양식이 이뤄지는 곳이다.<차근호 기자>자연산 채첩은 여름과 가을에 서낙동강 지역 녹산수문 인근 노적봉, 송정동 앞바다, 신호대교 일대 갯벌에서 아직도 볼 수 있지만 양이 많지 않아 채취해 팔 정도는 아니다. 강서구 송정동에 사는 한 주민은 "지금도 호미로 모래 아래를 살살 긁어 보면 재첩이 걸려서 나온다"며 "내다 팔 만큼은 안 되고 집에서 먹을 만큼은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침이면 재첩국을 파는 아지매의 '재첩국 사이오'가 골목골목 울리던 부산. 부산의 새벽을 열었던 이 목소리는 둑 조성 이후 일시에 사라졌다. 그로부터 30년 지난 지금 낙동강 하류는 물 흐름이 멈춘 채 죽음의 강이 되고 있다.주기재 부산대생명공학과 교수는 "재첩은 단순한 기수역 어자원에 앞서 사회문화적으로 부산에 큰 상징성을 갖고 있다"며 "둑이 열리면 재첩도 살아나겠지만 부산이 생태도시란 글로벌 이미지를 가지면서 생태관광 등 어마어마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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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 맞은 김광규 시인 "뚜벅뚜벅 걸어가듯이 시 썼어요"열한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 펴내…문학과지성사서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밤새도록 오른손이 아파서/ 엄지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설 상 차리는 데 오래 걸렸어요/ 섣달그믐날 시작해서/ 설날 오후에 떡국을 올리게 되었으니/ 한 해가 걸렸네요/ 엄마 그래도 괜찮지?" ('오른손이 아픈 날' 중)서정적 시어로 우리네 일상을 그려온 김광규(75) 시인이 등단 40주년을 맞아 열한 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지난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그는 자신의 모든 시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이번 40주년 기념 시집 역시 출판사는 문학과지성사다. 김 시인은 1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작가가 한 출판사에서 시집 열한 권을 계속해서 내놨다는 것도 기록"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식으로 시를 썼다. 그러다 보니 대략 4년에 한 번씩 시집이 나왔다"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 열두 번째 시집을 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2011년 종심(從心·일흔)을 맞이한 시인은 지난 4년간 바라본 세상을 담담하게 그린다. 일상을 소박한 시어로 읊은 시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가 우러나온다. 시집에 실린 66편의 시가 모두 그렇다. 김 시인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소재를 찾아 거기로부터 시를 풀어간다"며 "독자들이 제 시를 읽고 나서 '이렇게 시를 쉽게 쓸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그 안의 숨은 의미를 알고 놀랐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김광규 시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전과 다른 현재를 묘사할 때 드러나는 위트는 그의 시를 읽게 하는 동력 중 하나다. 그는 '가을 소녀'란 시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회화 속 소녀의 모습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또 '건널목 우회전'에서 갑자기 뛰어든 아이 때문에 급정거한 경험을 풀어놓으며 스키니 바지에 야구 모자를 쓴 아이 엄마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김 시인은 "지적 아이러니는 제 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며 "비평가들도 시에 유머가 있다며 양파껍질 같이 벗기면 벗길수록 새로운 게 나온다고 하더라"고 웃으며 설명했다. "스마트폰은 우리나라의 사회적 현상 중 하나죠.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고,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봐요. 그런 현상을 제 나름대로 아이러니로 표현한 거죠."언뜻 보면 쉽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심오한 그의 시는 외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의 시는 시인이 유학한 독일을 비롯해 10여 개국에서 번역됐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는 교과서에 수록됐고, 영국 BBC방송의 시 프로그램에도 소개됐다. 일본에서는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 많이 읽힌다. "해외 독자들이 제 시를 읽고 '시를 이렇게 쓰는 방법이 있구나'라고 한다고 해요. 시가 베스트셀러가 될 순 없지만 삶의 의미를 전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제 시가 번역돼 그런 의미를 전달한다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독어독문학을 전공한 김 시인은 서울대 졸업 후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서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 등단 당시 35살 '애 아빠'였던 그는 '늦깎이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문학과지성사를 만든 김치수, 김주연, 김병익, 김현과도 문우(文友)로서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재작년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김치수를 기리는 조시(弔詩)도 이번 시집에 실었다. "저도 조시를 써도 적나라하게 그분을 찬양만 하진 않아요. 조시도 시로서 작품가치가 있어야 하죠. 김치수나 전숙희 선생은 우리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신 분들이에요. 제가 저 세상에 가면 그 친구들이 먼저 가 기다리고 있다가 환영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썼어요."그렇다면 늙은 노모가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에게 제사를 올리는 모습을 그린 '오른손이 아픈 날'을 표제작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물었다. "우리나라는 여성의 힘으로 유지해오고, 발전해왔어요. 한국 남자들은 참 못 났죠. 가정을 지키지 못해 여성을 곤혹에 빠뜨리잖아요. 위안부 문제도 그런 것이죠. 시집와 자식들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하다 자기를 낳아준 친정 엄마 부양하기도 어려웠던 여성 입장에서 쓴 시에요. 제가 좀 여성주의자거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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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석 "양화대교는 내 얘기…가난했고 미친듯이 살았다"①가난했던 어린시절 연예계 활동 시작해 한류스타로 우뚝지난해 탈세논란으로 해외활동 주력…"2016년 국내에서 가열차게 뛸 것"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올해는 국내에서 정말 가열차게 활동할 겁니다. 한류스타도 국내의 기반이 없으면 공허하죠. 배우로서 다시 국내에서 인정받고 싶어요." 장근석이 돌아온다. 우리나이로 올해 서른이 된 그는 상반기 중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에게 인사할 예정이다. 그의 드라마 출연은 2013년 '예쁜 남자' 이후 3년 만이다. 아울러 국내 활동 역시 3년 만에 재개하게 된다. 애초 그는 지난해 1월 tvN '삼시세끼 어촌편'을 통해 자연인 장근석의 매력을 보여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촬영까지 다 해놓고 방송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터진 '탈세논란'으로 그는 2015년 국내 활동을 접어야했다. 할 말은 많아보였지만 입을 닫은 채 자신을 향해 쏟아진 손가락질과 비난을 견뎌낸 그는 서른을 앞두고 혹독하게 통과의례를 거친 듯 했다. 2016년을 맞아 새롭게 각오를 다진, 30대로 접어든 장근석을 최근 만났다.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달려야했던 꽃미남 소년은 한류스타가 됐지만, 이후 방황도 했고 이런저런 뭇매도 맞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섰다. 다음은 장근석과의 일문일답. --지난 1년 어떻게 지냈나. ▲학교 열심히 다녔다.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이고 이제 2학기 남았다. 쉬지 않고 올해까지 해서 마치려고 한다.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단편영화 4편을 찍었고 동료 학생들과 많이 어울렸다. 또 일본 등 해외에서도 부지런히 활동했다. --지난해 1월 탈세논란이 있었다.▲기사가 터졌을 때 일본에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하고 싶은데 탈세를 했다는 게 아니라 '논란'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당황했고 속상했다. 순식간에 나는 '탈세범'이 되더라. 3주 동안 휴대전화도 끄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만 다녔다. 일본에서도 산에 들어가 있었다. (지난해 장근석은 논란이 불거진 나흘 뒤 자신의 팬카페에 "이유가 어찌됐건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지고 그 논란의 중심에 제 이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과 드리고 싶다. 불과 며칠 전에 2015년은 정말 열심히 달려보자라고 글을 올렸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돼 난감하기도 하고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는 글을 올렸다.)지금껏 주식을 하지도 않았고 투기를 하지도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었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논란이 벌어져 많이 속상했다. --돈을 많이 벌었나.▲많이 벌었다. 그런데 내 수중에는 없다. 다 어머니가 관리하신다. 열심히 벌었고 많이 벌었다. 그래서 이제는 돈을 좇지는 않는다. 그런 욕심은 없다. 좀 더 큰 욕심을 내려고 한다. 우선 내 이름을 딴 재단을 올해 만들거다. 5년전부터 준비해왔다. 좀더 체계적으로, 좀 더 폭넓게 나눔을 실천할 거다. 연기 트레이닝센터를 만들어 후배도 양성할 거고, 에이전트도 세워서 신예들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선배들도 다 챙기고 싶다. 생활이 어려운 배우들이 많다.--기부는 쭉 많이 해왔지만 후배 양성이나 에이전트는 장근석에게 좀 낯설어 보인다. ▲고깝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깨 위의 책임감이 무척 크다. 지금껏 받은 사랑을 돌려 드리는 방법 중에는 내가 아는 노하우를 전수하고, 선후배 동료를 챙기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회사 운영에 관심을 안 가졌지만, 이제 30대도 됐고 돈을 좇지 않아도 되니 한류스타로서 큰 사랑을 받은 내가 지금껏 익힌 노하우로 연예계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20대 때는 돈을 벌기 위해 움직였다면 30대부터는 다르게 살고 싶다. --다시 돈 얘기다. 그동안은 돈을 좇았나. ▲가난했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서 '참 좋은 노래다', 그리고 '내 얘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택시를 운전하셨고 어머니가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셨다. 제천에서 살던 우리 세 식구는 외동아들 교육은 서울에서 시켜야겠다는 어머니의 뜻으로 내가 12세 때 서울로 올라왔다. 20만원 들고 상경했기 때문에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해야했다. 아버지는 양화대교가 아니라 천호대교를 주로 타셨고, 나는 그때 속옷 광고를 찍었다. 세 식구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미친듯이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게 소원이었고 그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삼겹살 들어간 김치찌개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벌어 2년 만에 외가를 벗어나 월세 20만원짜리 우리 집으로 나갔다. 우리 식구는 다시 50만 원을 바라보고, 또 100만 원을 바라보고, 또 200만 원을 바라보며 살았다. 조금씩 돈을 벌어가는 게 행복했다. 하지만 돈은 아무리 벌어도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8개월 살다 돌아왔다. 중학교 3학년 마치고 갔다. 내가 계속 영어 배우고 싶다고, 유학 가고 싶다고 졸랐다. 미국 갈 돈은 없으니 삼촌이 식당을 하시던 뉴질랜드로 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거기서 영어는 안 배우고 일본 친구들하고 어울렸다. 8개월 동안 일본어를 배우고 왔다. 그때부터 일본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으로 진출할 꿈을 키웠다. 금세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MBC '논스톱4' 캐스팅 제안이 와서였다. 역시 돈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에 출연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진짜로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는 한류스타가 됐다. ▲일본 진출 꿈을 키운 지 9년 만에 (꿈의 상징인) 도쿄돔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감개무량했고 목표를 달성해 벅찼다. 그런데 그 이후 생각지도 못한 상실감이 밀려들더라. 그토록 달성하고 싶어 앞만 보고 뛰어왔던 목표를 마침내 달성하고 나니 갑자기 뭘 해야할지 방향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인생 최고의 희열을 맛본 직후 곧바로 인생 최고의 시련을 경험한 셈이다. 많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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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백지 위에서 새 정치질서 구축"…더민주 탈당(종합)(서울=연합뉴스) 송수경 박수윤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의 전신) 공동대표였던 김한길 의원이 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비주류의 좌장격인 김 전 대표가 탈당함에 따라 안철수 의원의 탈당으로 시작된 더민주의 분당사태는 가속화하게 됐다. 지난해 12월13일 안 의원이 탈당한 이후 김동철 문병호 유성엽 최재천 권은희 임내현 황주홍 의원에 이어 김 전 대표까지 이탈에 가세하면서 더민주를 탈당한 현역의원은 안 의원을 포함해 모두 9명으로 늘었다. 더민주 의석은 118석으로 감소했다. 특히 김 전 대표의 탈당으로 더민주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창업주(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 두 명 다 당을 떠나게 됐다. 김 전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오늘 당을 떠난다. 새해를 여는 즈음에 새 희망을 향해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며 "총선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라고 탈당을 선언했다. 이어 "이제 백지 위에 새로운 정치지도를 그려내야 한다"며 '창조적 파괴'를 강조한 뒤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새로운 정치질서 구축에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수명이 다한 양당 중심 정치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허물어내야 한다"며 "이제 묵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우리 정치의 새 장을 열어가는 데에 진력하겠다"고 덧붙였다. 김 전 대표는 탈당 배경과 관련, "반민주·반민생·반역사의 정치를 고집하는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에게 기필코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애오라지 계파이익에 집착하는 패권정치의 틀 속에 주저앉아 뻔한 패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라고 문재인 대표 등 친노 진영을 정면비판했다. 또한 당 대표 시절인 2014년 3월 안철수세력과의 통합 당시를 회고, "안 의원이 민주당 패권세력에게 자신의 꿈이 좌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고, (저는) 극복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의 무서운 힘 앞에 저의 무력함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승리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변해야 한다"며 "국민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정치 말고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치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극복할 정치행태로 ▲안에서 싸우다 기운을 다 소진해버리는 정치 ▲오만과 독선과 증오와 기교로 버티는 정치 ▲아무리 못해도 제1야당은 된다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정치 ▲패권에 굴종하지 않으면 척결대상으로 찍히는 정치 ▲계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 ▲비리와 갑질과 막말로 얼룩진 정치를 꼽았다. 그는 "패권정치와 싸우고 참고 견디는 동안 많이 불행했다"며 "바른 정치로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남은 힘을 온전히 바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기자회견 후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향후 행보와 관련, "오늘 오후부터 생각해보겠다"며 안철수 신당 합류 여부에 대해 "의논해보겠다"고 답했다. 이어 "공동창업자 두 명 다 당을 떠난다는 것이 이 당의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떠날 뿐 대부분 당원동지들과 여전히 같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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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우 연애는 별로"…'응팔' 호기심 떨어지네19일 시청률은 최고 기록했지만 화제성지수는 떨어져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덕선이 연애를 보여달라."tvN '응답하라 1988'이 지난 19일 16%를 기록하며 자체 시청률 경신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시청 반응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일고 있다. 주인공 덕선(혜리)의 연애와 미래의 신랑 찾기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이미 관계가 확정된 보라(류혜영)와 선우(고경표)의 연애가 비중 있게 조명되면서 드라마에 대한 흥미가 반감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 4회 연속으로 정환(류준열)의 이야기가 급감하고, 예고편에서 잇따라 택(박보검)에 대한 엉뚱한 '낚시'(?)가 이어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청자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가슴 따뜻한 코믹 가족극이라 청춘의 연애 외에도 다양한 에피소드가 관심을 끌고 있는 게 '응답하라 1988'의 특징이지만, 아무래도 주인공인 덕선을 놓고 친구들의 경쟁 구도에 불이 붙을 때 이야기에 긴장감이 조성되고 호기심도 높아지게 된다. 그런데 11화에서 택이가 친구들에게 덕선에 대한 마음을 깜짝 고백한 이후 덕선과 연애를 시작하려던 정환이 갑자기 입을 닫아버린채 급정지를 하고, 이후 이같은 상황이 14화까지 별 진전없이 이어지면서 덕선의 연애는 답보 상태에 놓여있다. 시청자들은 그사이 택이라도 치고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12~14화 예고편에서 잇따라 택이에 대한 뭔가 강렬한 암시가 있어 궁금증을 자극했지만 알고보니 모두 제작진의 '악마의 편집'이었음이 드러나자 인터넷이 부글부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관계가 확정됐고, 캐릭터에서 큰 특징이 없는 보라와 선우의 연애 에피소드가 치고 들어오자 긴장감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한성질'하는 못된 수재 언니 캐릭터가 극에 감칠맛을 더했던 보라는 연애를 하면서 특유의 엣지가 사라졌고, 원래가 흠 잡을 데 없던 착한 모범생 선우와의 케미는 밋밋한 상황이다. 심지어 보라는 연애를 하면서 갑자기 겨울코트 패션쇼를 하는 듯 다채로운 의상을 보여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남자친구인 선우는 물론이고, 동생들도 모두 '없는 살림'을 보여주기 위해 같은 옷을 계속 입고 나오는 상황에서 홀로 튀어 몰입도를 해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상황은 다음소프트가 트위터 버즈량을 기반으로 집계하는 방송프로그램 화제성지수에 바로 반영됐다. 방송 둘째주부터 한주도 빠짐 없이 금, 토, 일 사흘 연속 화제성지수 1위를 점령했던 '응답하라 1988'은 지난 18~20일 처음으로 이 기록을 이어가지 못했다. 18일에는 1위를 차지했지만, 19일에는 MBC '무한도전'에 밀려 2위, 20일에는 '무한도전'과 SBS '런닝맨'에 뒤져 3위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주말 사흘은 물론이고, 일주일 내내 화제성지수 1위를 차지했던 때와 비교하면 누리꾼들의 흥미도가 떨어졌음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 자체는 입소문이 자자하고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청률이 계속 상승세지만, 덕선의 이야기가 주춤한 지난 3화는 화제성에서 떨어진 것이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14화의 스타로 동룡(이동휘)이 부상했다. 극중 '도롱뇽'으로 불리는 까불이 동룡이 사랑에 마음 고생 중인 덕선에게 찰나의 순간이지만 멋진 조언을 한 모습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네티즌들은 "도룡뇽이 드디어 한건 해냈구나 멋있었음", "14화 최고의 명장면은 도룡농의 상담 신이 아닐까"라며 동룡의 한방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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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의 참새방앗간> 이병헌과 신은경…배우의 사생활 유감'내부자들'·'아치아라' 호연으로 찬사…사생활 논란으로 구정물 튀어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우리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 허자고~"일자무식의 깡패는 모히또가 뭔지, 몰디브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아예 모히또가 어딘가에 있는 나라이고, 몰디브가 뭔가 이국적인 술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건치를 시원하게 '씨익' 드러낸 채 전라도 사투리를 살짝 구사하면서 건들건들 대는 폼에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이 깡패가 어느 순간 돌변하면 숨을 헉 멈추고 쳐다보게 된다. 배신당하고, 짓밟히고, 뒤통수를 맞은 이후 그가 보인 눈빛, 표정, 비장함에서는 '풋내기'들은 절대 따라잡기 어려운 마성이 뿜어져 나온다. 자연히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온다. 관객 500만을 넘어 이번 주말 600만을 바라보는 영화 '내부자들'의 배우 이병헌이다. "나는 괴물을 없애려 했던 것뿐이야!"어린시절 동네 아저씨에게 몸을 유린당한 뒤 평생 그 괴물로부터 도망치고자 발버둥쳤던 여자는 끝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과거를 숨긴 채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품위있게, 도도하게 살아왔지만 그녀는 끝내 과거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고 그 과정에서 슬픔과 공포, 광기가 무지개 빛깔로 뿜어져나왔다. 역시 하루아침에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다. 지난 3일 종영한 SBS TV '마을 - 아치아라의 비밀'에서 신들린 연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은 배우 신은경이다. 최근 이병헌과 신은경의 연기를 보며 즐거움과 감동을 얻은 관객과 시청자가 적지 않다. 찬사와 감탄이 인터넷을 넘실댄다. 그런데 새옹지마요, 호사다마다. 사생활 때문이다. 이병헌은 '내부자들' 개봉에 앞서 한바탕 난리굿을 치러야 했고, '아치아라의 비밀'을 끝낸 신은경의 앞에는 진흙탕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이병헌에게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거나 '시간이 약이다'는 말이 통하는 것 같다. 지난해 터져 올초까지 진행됐던 그의 '불륜 스캔들'은 온갖 추문과 루머, 의혹으로 점철됐고, 그 과정에서 이병헌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와 관련한 인터넷 기사가 줄잡아 몇천건은 됐고, 스캔들은 다각도로 낱낱이 해부돼 지상 중계됐다. 출중한 연기력과 카리스마로 아시아는 물론이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에도 잇따라 출연하며 고공행진 중이던 배우 이병헌은 연기가 아닌 사생활로 갈갈이 찢겨졌다. 대중은 분노했고, 손가락질했고, 스캔들을 실시간으로 즐기며 소비했다. 그 와중에 지난 8월 개봉한 이병헌 주연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은 처참한 흥행 실패를 맛봤다. 이병헌 스캔들의 최대 피해자가 '협녀'의 여주인공인 전도연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번에는 이병헌이 진짜 몰락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연기로 일어서는 듯 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내부자들'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이병헌의 연기에 대한 극찬도 보조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승우, 백윤식, 이경영 등 다른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일품인 덕도 크지만 '내부자들'의 이병헌은 대타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이병헌이 이렇듯 한숨 돌리게 된 반면, 신은경은 지금 한창 가정사 그리고 금전 문제와 관련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 시어머니, 전 매니저에 전전 매니저의 발언까지 인터넷에서 전파되고 있다. '쟁점' 하나는 이혼 후 장애가 있는 아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는 의혹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거짓 모성애' 논란이고, 또다른 쟁점은 그가 이전에 거친 기획사들과 얽힌 금전 문제다. 신은경은 직접 방송 인터뷰와 기자 간담회에 나서 여러 의혹에 대해 해명을 했고, 현 소속사를 통해서도 공개적으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논란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인터넷과 대중은 새롭게 떠오른 '핫이슈'를 흥미롭게 따라가고 있다. 신은경으로서는 '아치아라의 비밀'과 그 직전 tvN '오 나의 귀신님'에서 보여준 코믹한 연기로 잇따라 호평을 받자마자 급전직하한 셈이다. 연기력에 대한 칭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저분한 사생활 논란과 공방이 그의 이름 석자를 설명하고 있다. 한 명의 좋은 배우를 꽃 피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밤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어야한다. 천의 얼굴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감동을 주는 연기는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빚어진다. 그걸 알기에 대중은 '웬만하면' 금세 잊어준다. 좋은 연기를 마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박수를 쳐준다. 그래 왔다. 이병헌과 신은경에게도 그랬다. 두 배우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래도 유감이다. 배우의 사생활 유감이다. 좋은 배우라서 그렇고 처음이 아니라서 더 그렇다. 배우가 공인인가, 사생활은 어디까지 보호돼야하는가는 인터넷을 뒤덮었고, 현재 뒤덮고 있는 거센 논란 앞에 무의미해진다. 이쯤되면 사생활도 더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위험 경고등이 켜질 때 관리에 들어가야한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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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희 "30대엔 '대장금', 40대엔 '애인있어요'가 대표작"연기 인생 2막…카메라 꺼진 뒤에도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몰입"상대 배우까지 배려하는 김현주에게 정말 고마워"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SBS TV 주말극 '애인 있어요'의 최진언은 아내로부터 등을 돌리고 후배와 사랑을 속삭인 것도 잠시, 아내와 다시 사랑에 빠지면서 후배를 외면한다.이 나쁜 남자가 언제부턴가 뜨거운 인기를 끈 것은 배우 지진희(44)의 공력 덕분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기자간담회장에서 만난 지진희는 "최진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라고 말했다. "진언은 오로지 아내만을 사랑해요. 아내에게 정말 지치고 지쳐서 헤어졌던 거죠. 초반부의 강렬한 불륜남 이미지가 유지되면 시청자들이 우리 드라마를 왜곡해서 볼 수 있겠다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제대로 봐준 것 같아요." 지진희도 초반에는 자신의 캐릭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걸 유독 꺼린다는 지진희는 아내 도해강(김현주 분)과 후배 강설리(박한별)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나쁜 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지진희는 "그걸 극복하게 했던 것이 진언의 한 여자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라면서 "그러다 보니 설리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깝고 미안한 감정이 든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여름부터 '애인 있어요'를 촬영한 지진희는 드라마에 무척 몰입한 모습이었다. 카메라 불이 꺼진 뒤에도 극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을 정도라고. 지진희는 함께 드라마를 이끄는 김현주를 두고 "완벽한 캐스팅"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둘은 SBS TV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이후 11년 만에 다시 만났다. "1인 4역을 거부감 들지 않게, 과장하지 않고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국내에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손가락 안에 꼽을 배우죠. 김현주씨 장점은 혼자 하지 않고 상대 배우까지도 생각한다는 거에요. 정말 고맙죠." 2003년 MBC TV 사극 '대장금'으로 이름을 알린 지진희는 '애인 있어요'를 통해 연기 인생 2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진희 또한 "30대 대표작이 '대장금'이었다면 현재로서는 '애인 있어요'가 40대 대표작인 것 같다"라면서 "다만 '대장금' 때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병훈 PD가 시키는대로 했다면, 이번에는 제가 더 많이 힘을 써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50부작 드라마 '애인 있어요'는 쾌속으로 달렸음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막 해강이 옛 기억을 되찾았을 뿐이다. 지진희는 "우리가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많다"라면서 "해강이 본연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고, 설리는 악해질 것이고, 진언은 중간에서 해강이를 계속 바라보면서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고 절규하는 모습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 도해강과 최진언의 재결합에 대해서는 "선택은 해강의 몫"이라는 답을 남겼다. "진언 때문에 해강이 상처받고 사고를 당했고 기억을 잃은 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잖아요? 진언 마음은 해강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해강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거에요. 결국 선택은 해강의 몫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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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신드롬> ①너도나도 "바로 내 얘기야!"시청률 12.2%·SNS 화제성 압도…쌍문동 5인방에 보라·정봉까지 캐릭터 생생"80년대 청소년기 보낸 세대, 안락하고 아득했던 시절로 기억" <※편집자 주 =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가 초등학생부터 40~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기를 끌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라며 관전평과 감상을 쏟아내고 있고, 1980년대의 시대상을 되짚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당시에 유행하던 음악이 다시 주목받고 있으며, 유통업계에서는 발빠르게 1980년대 복고 붐에 편승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을 타고 온 1980년대의 추억을 3꼭지로 나눠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학교 공부만 빼고 뭐든 잘하던 동네 형은 진짜로 있었다. 우표를 수집하고 정갈하게 글씨를 쓰며, 정성껏 엽서에 사연을 적어 라디오 프로그램에 수시로 보내던. 정봉이는 옆집에 있던 오빠요, 형이다. 또 독서실만 가면 프라임 영어사전이나 정석을 벤채 잠을 달게 자는 학생들이 있었다.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잤다. 덕선이는 아랫집에 살던 아이였다. '응답하라 1988'은 지난 28일 방송된 8화에서 평균 시청률 12.2%, 최고 시청률 14%를 기록하면서 역대 '응답하라' 시리즈 최고 성적인 '응답하라 1994'의 11.9%(마지막 21화)를 뛰어넘었다. 이러한 인기의 일등공신은 살아있는 캐릭터다. 1988년에 태어나지도 않은 현재의 초등학생부터 당시 학창시절을 보낸 40~50대까지 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있는 캐릭터의 재미와 그들이 부딪히며 내는 하모니가 살갑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EBS TV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 출연자들이 '응답하라 1988'에서 성균과 덕선이 즐겁게 주고받는 "아이고 김사장~ 반갑구만 반가워요"를 요란하게 흉내내고, 극중 선우-정환-동룡이 춤추며 불렀던 '어젯밤 이야기'의 소방차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응답하라 1988'의 존재감을 설명한다.쌍문동 골목 친구 5인방처럼 1988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 아니었다고 해도,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너나 할것 없이 '응답하라 1988'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이는 5인방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하나하나 살아있어, 나이를 건너뛰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바로 내 얘기잖아"시청자들은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저마다의 기억으로 1988년을, 1980년대를 기억해내며 웃고 운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고 고백하는 것은 드라마의 정서와 시대상이 자신의 아련하고 애틋한 추억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려니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앞다퉈 자신만의 해몽을 내놓고 있다. 예비군복을 불량하게 걸친 채 동시상영극장을 찾았고, 소독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면 소리를 지르며 좋다고 그 뒤를 쫓아달렸다. 경주로 간 수학여행에서 수십명이 바퀴벌레 나오는 큰방에서 한데 엎어져서 잤고, 엄마 심부름으로 집앞 가게에 두부와 콩나물을 사러 갔다왔다. 오락실에서 갤러그 오락을 하며 초 집중해서 미친듯이 손가락을 튕기고,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켰으며, 3단 보온밥통을 두개씩 들고 등교했다. 하지만 대치동 은마아파트 한 채가 5천만원이고, 은행 금리가 15%하던 '판타스틱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사실 지금 얼마나 정확하고 생생할까. 또 그 기억이 드라마의 배경인 1988년의 기억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상관없다. 시청자는 잊고지냈던 어린시절 친구가 연락을 온 것처럼 반갑게, 혹은 상상도 못했던 신기한 시절을 호기심 어리게 소비하면서 나이를 떠나 '응답하라 1988'에 빠져들고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리면 나쁜 기억이 나기도 하지만 비율적으로 좋았던 것을 더 많이 기억해 낸다"면서 "지나고보면 좋았던 것 같고, 그때가 지금보다 편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이어 "이전에도 90년대 복고 붐이 불었지만 90년대와 80년대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현재 '응팔'에 열광하는 시청층은 80년대 청소년기를 보냈던 세대이고 그들에게는 당시가 각박함이나 엄혹함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안락하고 아득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특히 아동기였다면 귀여움을 한껏 받았던 좋았던 시절로 기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쌍문동 골목 친구들…그리고 보라·정봉 화장을 귀신같이 덕지덕지하고 맥주로 머리카락을 염색하며,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덕선의 해맑고 씩씩한 모습은 88년에만 유효하지 않다. 한영사전을 펴본 적이 없어 새하얗고, 어떤 때는 뇌가 없어 보일 정도로 백치미를 과시하지만 깡과 배짱, 착한 마음씨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얼굴도 예쁘다. 이런 애 꼭 있다. 일차로 수학을 포기했고, 이차로 대학을 포기했다고 선언한 동룡은 '쌍문동의 박남정'이라는 별명처럼 춤꾼이다. 교복 입고 현란한 춤사위를 펼치면서, 잔머리가 탁월하게 발달한 동룡은 '하필' 자기 학교 '학주'(학생주임)의 아들이다. 실제로 당시 학생들에게 하늘 같고, 무서웠던 선생님의 아이들이 다 모범생은 아니었다. 공부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며, 햄 반찬에 비싼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까칠한 정환과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지만 공부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며 성격마저 좋은 선우는 이 드라마에서 여심을 사냥하는 4번 타자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기억 속에는 이런 아이들도 비슷하게 남아있다. 다만 천재 바둑기사를 이웃으로 두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 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드라마는 택이가 바둑 외에는 모든 면에서 어수룩한 점을 부각하며 '상등신'이라는 별명을 붙임으로써 매사 서툴렀던 어떤 친구에 대한 기억을 일깨웠다. 인터넷에서는 드라마 초반 동물원의 '혜화동'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정지 화면을 통해 이들 쌍문동 골목 친구 5인방의 어린시절을 조명한 대목이 가슴을 쳤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1980년대 주택가 골목길에 대한 기억이 있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가슴 한켠 매일같이 어울려다니던 골목 친구들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났을 것이다. 드라마는 이들 5인방의 뚜렷한 개성을 부각하면서도 이들이 10여 년간 한결같이 붙어다니며 끈끈한 우정을 쌓은 시간들에 애틋함을 부여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여기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예요"라면서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를 결연하게 부르고, 가래를 뱉어가며 아버지 몰래 담배를 피우는 보라의 다분히 '시크'한 모습도 이 드라마의 묘미다. 공부는 잘하지만 '못돼 쳐먹고 이기적인 언니'인 보라의 불같은 성질은 은근히 톡 쏘는 맛이 있다. 또 보라와는 정반대로 순하기 그지없는 대입 6수생 정봉의 한 템포 쉬어가는 엉뚱함도 드라마의 캐릭터를 풍성하게 하며 채널 고정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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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소극장의 밤 불태운 '팝의 전설' 엘튼 존(서울=연합뉴스) 한혜원 기자 = 갑작스러운 추위가 찾아온 27일 밤, 서울 이태원 거리를 걷던 시민들은 찬바람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영국 팝스타 엘튼 존(Elton John·67)이 무대에 오른 소극장은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었다. 오후 8시 정각. 수용인원이 딱 500명인 이 공연장 무대 위에 새파란 셔츠에 비즈가 박힌 재킷을 입고, 파란 안경에 은색 귀고리를 한 엘튼 존이 나타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바로 눈앞에 있는 '팝의 전설'을 화면에 담기에 바빴다. 이태원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서 공연하는 엘튼 존 피아노 앞에 앉은 엘튼 존은 경쾌한 리듬의 '더 비치 이스 백'(The Bitch Is Back)을 부르며 인사를 대신했다. 강하게 꽂히는 피아노 연주가 압권인 '베니 앤드 더 젯츠'(Bennie And The Jets), 감미로운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캔들 인 더 윈드'(Candle In The Wind)까지 3곡을 내리 부르고서 그는 관객에게 "좋은 밤입니다, 서울!" 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번 공연은 현재 전 세계 40개 도시를 돌며 진행하는 엘튼 존 '올 더 힛츠'(All the Hits) 투어의 일부다. '선택받은 자'만 참석할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은 40개 도시 가운데 서울이 유일하다. 현대카드서 맡은 이번 공연은 티켓 개시 1분도 안 돼 매진됐다. 엘튼 존은 세계 투어를 위해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춘 밴드를 불러들였다. 데이비 존스톤(기타)과 킴 블라드(키보드), 매트 비조넷(베이스), 존 마혼(퍼커션) 등 익숙한 밴드 멤버가 무대에 올랐고 1969년부터 엘튼 존 밴드와 함께한 나이젤 올슨(드럼)은 백발로 드럼 앞에 앉았다. 수십 년을 함께 연주한 밴드와 엘튼 존의 화음은 공연장을 풍성한 소리로 꽉 채웠다. 스탠딩 관람으로 진행된 공연에서 관객들은 밴드가 만드는 완벽한 연주를 온몸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엘튼 존은 '리번'(Levon), '타이니 댄서'(Tiny Dancer), '대니얼'(Daniel), '필라델피아 프리덤'(Philadelphia Freedom)을 부르며 관객을 매료시켰다. 마치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현란한 피아노 연주를 보여주면서도 여유롭게 관객을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응을 유도했다. 만족스러운 연주를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에게 소리지르라는 손짓을 했다. 이태원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서 공연하는 엘튼 존 히트곡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에는 관객들이 함께 후렴구를 부르며 감상에 빠졌다. '로켓맨'(Rocketman)의 긴 피아노 전주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들었다. '아이 게스 댓츠 와이 데이 콜 잇 더 블루스'(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유어 송'(Your Song) 등 중간 박자의 곡을 몇 곡 선보인 엘튼 존은 뒤이어 신나는 노래를 연달아 부르며 무대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임 스틸 댄싱'(I'm Still Dancing), '유어 시스터 캔트 트위스트'(Your Sister Can't Twist), '새터데이 나잇츠 올라이트 포 파이팅'(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까지 빠른 박자의 곡이 연이어 연주되자 그전까지 얌전하게 무대를 보던 관객들도 일제히 몸을 흔들었다. 건반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엘튼 존의 연주도 이때 최고에 달했다. 엘튼 존은 2004년 처음 한국을 찾았고, 2012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내한 공연이다. 엘튼 존은 "한국 팬들은 그동안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주고, 친절하고, 관대했다"며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엘튼 존은 힘찬 박수에 대한 보답으로 앙코르곡 '크로커다일 록'(Crocodile Rock)을 선보였다. 관객들은 이 노래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앙코르"를 외치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연주는 이게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