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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신문 "제2의 6·25전쟁시 종착점은 미국 멸망"6.25 66주년 북한 청년 결의모임(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6·25 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23일 청년학생들의 결의 모임이 신천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2016.6.24 <<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 utzza@yna.co.kr"화성-10 시험발사…선제 핵공격 능력 과시" (서울=연합뉴스) 문관현 기자 = 북한은 6·25전쟁 66주년인 25일 미국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종착점은 미국의 멸망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6·25전쟁 발발 66주년 논평을 통해 "미제가 지난날의 패전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고 핵전쟁의 불을 지른다면 그 도발의 대가가 얼마나 쓰디쓴 것인가를 똑똑히 알게 해줄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신문은 "현재 조선반도는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에 있다"면서 "미제는 남조선 괴뢰패당과 작당하여 해마다 대규모 핵전쟁연습을 끊임없이 벌려(벌여) 놓으며 우리 공화국에 대한 핵 위협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그러면서 "공화국(북한)은 수소탄까지 보유한 핵 강국이 되였다"며 "최근 성공적으로 진행한 지상대지상(지대지) 중장거리전략탄도로케트(로켓) '화성-10' 시험발사는 우리도 적들을 항시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선제 핵 공격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힘있게 과시하였다"고 주장했다.신문은 "지금 조선반도(한반도) 정세는 전쟁 전야의 초긴장 상태에 놓여있다"면서 "년례적(연례적)이니, 방어적이니 하는 것들을 벗어던지면서 임의의 시각에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핵전쟁을 도발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어 "원인 모를 자그마한 사건으로 정세가 일순간에 교전 직전까지 치달아 올랐던 지난해 8월 사태도 미국이 남조선 괴뢰패당과 감행한 '을지 프리덤 가디언' 합동군사연습을 배경으로 하여 빚어졌다"고 억지 주장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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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창촌 탈바꿈> ②산업형 성매매 역사…1900년 일본인 거류지서 시작5공화국때 전성기, 2004년 성매매특별법 발효후 쇠락 (전국종합=연합뉴스) 밤마다 홍등을 밝혔던 도심 집창촌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집창촌이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성매매 근절'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성매매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 국내 집창촌의 역사 국내 '산업형 성매매'가 시작된 시기는 1900년 전후다. 조선시대까지는 철저한 밀매음 형태였다.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인 집단 거류지에서 일본식 유곽(遊廓)이 형성되기 시작해 1900년대 부산에 집창촌이 생겼다.일본강점기 성매매의 특징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받는 공창 형태였다.일제는 1916년 '유곽업 창기 취체규칙'을 만들어 성매매를 공식화하고 창기들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국내 최초의 공창 제도다.부산, 인천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생겨나던 성매매여성 집결지는 성병 예방, 풍기문란 예방을 위해 한 곳으로 집중된다.유곽에서 시작된 집창촌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1947년 공창제가 폐지되면서 발 빠르게 변모한다.정부는 1961년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했지만 집창촌을 묵인했다.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일본인들 기생관광이 외화벌이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이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향락 산업이 더욱 확산했다. 도시 뒷골목에는 속속 집창촌이 형성됐다.1970년대 중반에는 티켓다방이 등장했고, 1980년 이후 제5공화국 시절에는 군사정권의 3S(Sports, Screen, Sex) 정책 중 하나로 성매매가 전성기를 맞았다.특히 1988년 올림픽 개최와 규제 완화로 산업형 성매매와 음성적 매매춘이 등장해 홍등가는 더욱 번성했다.집창촌의 확대는 포주의 학대와 대규모 화재 등 각종 문제를 초래했다.집창촌은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전주 집창촌인 '선미촌'의 밤 풍경◇ 주요 집창촌의 유래 서울 청량리 588과 파주 용주골, 부산 완월동, 대구 자갈마당, 춘천 난초촌, 전주 선미촌 등 전국 곳곳의 집창촌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대부분이 역이나 터미널 근처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으로 짐작하지만 지역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서울의 대표적인 집창촌인 '청량리 588'.이곳은 6·25전쟁 때 경원선 종점이었다. 당시에 강원도 철원·화천·양구 등 동부전선 격전지로 떠나는 군인들을 상대로 성매매가 이뤄졌다. 명칭은 전농동 588번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588번 시내버스가 이곳을 지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부산 서구 초장동과 충무동에 걸쳐 있는 완월동은 일제가 만든 최초의 계획된 집창촌이다.일본강점기 이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형식적으로 공창제가 폐지됐으나 항구를 낀 부산은 물자나 사람이 모여들었고 완월동에서는 성매매가 번창했다.윤락행위 방지법이 시행됐지만 완월동은 사라지지 않았고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여성인권단체 '살림'의 기록을 보면 1979년 당시 완월동에는 124개의 성매매 업소가 있었다.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생기면서 쇠락의 길을 걷던 완월동은 암암리에 영업을 해왔고 현재는 영업규모가 크게 줄어 50여개 업소에 250여명의 여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6·25전쟁 때 미군기지가 들어서며 생겨난 경기도 파주시 용주골은 한때 2만여㎡에 성매매업소가 200여 곳, 종사자가 500∼600명에 달했다.2000년대 들어 미군기지가 이전한 데다 2004년 말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자 업소와 종사자 수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80여 업소가 180여 명의 종사자를 두고 영업하고 있다.인천시 남구 숭의동 360번지 일대에 형성된 '옐로하우스'는 인천의 집창촌이다.인천 개항 후 1902년 현재 인천 중구 신흥동 신흥시장 일대에 들어선 일본 유곽으로 시작했다. 1961년 군사정부의 사회정화 방침에 따라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옐로하우스는 2008년 도시 환경정비 구역으로 지정돼 철거사업이 추진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경기 침체로 재개발 사업은 진척이 없는 상태다.1950년대 당시 전주역(현 전주시청) 주변에 들어선 전북 전주시 선미촌은 한때 400명이 넘는 여성이 있었지만 이곳 역시 성매매방지특별법 발효 이후 종사자가 100명 밑으로 급감했다.강원 춘천시 난초촌은 해방 후 미군기지가 들어선 이후 조성됐다. 2006년 재개발로 문을 닫은 장미촌과 함께 성업을 이뤘다.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과 2005년 10월 경춘선 무궁화 열차의 종착역이던 옛 춘천역이 폐쇄된 데 이어 미군기지까지 문을 닫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이들 집창촌의 시작은 달랐으나 공통으로 '성매매방지특별법'이란 직격탄을 맞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 집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굴곡진 인생 스토리…문학작품과 영화의 배경 집창촌은 각종 문학작품과 영화의 배경으로 주목받았다. 1973년 소설가 조선작이 발표한 '영자의 전성시대'는 성매매 여상을 다뤘다. 부잣집에서 식모로 일하던 시골 아가씨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당한 뒤 집을 뛰쳐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한쪽 팔을 잃고 성매매여성으로 전락한다.이 소설은 2년 뒤 영화로도 제작돼 히트했다.소설은 당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상경했던 젊은 여성들의 잔혹한 삶을 그려 충격을 던졌다.임권택 감독은 '티켓(1986)'과 '노는 계집 창(1997)'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필름에 담았다.김기덕 감독도 영화 '나쁜 남자(2001)'에서 성매매를 다뤘다.집창촌 폭력배인 남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여대생에게 모욕을 당하자 복수심으로 그녀를 성매매여성으로 타락시킨다.그는 한 면은 거울, 다른 한 면은 유리인 벽을 통해 그녀를 지켜본다. 청량리 588은 소설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과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홍성철 '유곽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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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임진강나룻배마을 '평화 생태마을'로 탈바꿈나룻배학교·관광농원·글램핑장 등 조성…4일 문열어 (연천=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38선 이북에 위치해 6·25전쟁 때 치열한 격전이 치러진 경기도 연천군 북삼리의 임진강나룻배마을이 평화생태마을로 조성돼 4일부터 문을 연다.군 관계자는 3일 "임진강나룻배마을이 2012년 행정안전부가 공모한 평화생태마을 조성사업으로 선정된 이후 이곳에 최근까지 25억원을 들여 낙후한 접경지역 소득관광 자원화를 위한 시설물들을 조성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기존 폐교를 증·개축해 나룻배 체험학교를 조성하고 지역주민들이 생산한 참기름과 들기름, 고춧가루 등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가공판매장도 만들었다.또 관광객이 농작물을 심거나 수확할 수 있는 관광농원(3천643㎡)과 야영을 즐길 수 있는 글램핑장(9천963㎡)도 조성했다.나룻배체험학교에는 어린이들이 트랙터에 연결된 보트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거나 겨울철 논두렁을 달릴 수 있는 대형 놀이기구도 준비했다. 가족단위 관광객과 어린이들은 봄에 모내기 체험과 딸기 따기, 감자·고구마심기, 여름에는 메기잡기, 옥수수·수박·토마토 수확, 가을에는 벼 베기, 메뚜기 잡기, 겨울에는 눈썰매·얼음썰매 타기, 팽이치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이밖에 지역 특산품인 율무를 이용한 율무강정·율무를 넣은 김치·두부 만들기 등을 체험할 수 있으며 태풍전망대와 열쇠전망대를 둘러보는 안보견학도 할 수 있다.평화생태마을은 주민 의견과 지역 전문가의 맞춤형 컨설팅, 군의 행정 지원과 관리 등 주민과 전문가, 군의 공동참여 방식으로 조성됐다.북삼리 주민으로 구성된 연천나룻배마을영농조합법인(대표 전해원)이 직접 운영해 마을 소득증대와 주민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군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도 접경지역의 주민주도형 소득창출 사업들을 더 많이 발굴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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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선교장, 역사 숨 쉬는 한국 최고 전통가옥시인·묵객이 드나들던 풍류문화의 산실 (강릉=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선교장은 300여 년 동안 그 원형이 잘 보전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1692∼1781)은 어머니 안동 권씨와 함께 충주에서 강릉으로 이주했다. /이진욱 기자 집터를 찾던 안동 권씨와 이내번 모자는 족제비 무리를 쫓아가다 명당 터를 발견했고, 1703년 처음 안채인 주옥을 시작으로 활래정,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열화당, 중사랑채 등 무려 10대에 걸쳐 증축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선교장은 경포호수가 집 앞까지 이어져 배로 다리를 놓아 건넜다고 해 ‘배다리마을’ 또는 ‘배다리집’으로도 불린다. 이름을 풀면 사람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船橋)이고, 식량과 물품을 직접 생산할 수 있다 하여 장(莊)이다. /이진욱 기자 지금 경포호의 둘레는 4㎞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12㎞에 달할 정도로 드넓은 호수였다고 한다. 심명숙 문화해설가는 “선교장은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백미”라며 “선교장 바로 옆에 경포호수와 경포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수많은 시인, 묵객이 선교장을 찾았다”고 말한다.조선 후기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인 선교장에 들어서면 맨 먼저 활래정(活來亭)과 사방연지(四方蓮池)가 반긴다. 연못을 끼고 오른쪽으로 걸으면 월하문(月下門)에 이른다. 너비가 2m 남짓한 작은 문 기둥에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들고), ‘승고월하문’(僧鼓月下門 :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이란 시가 걸려 있다. 심명숙 문화해설가는 “이 주련(기둥에 써 붙이는 글씨)은 하루 묵고 갈 거처를 찾는 나그네는 망설이지 말고 문을 두드리고 쉬었다 가라는 뜻”이라며 “문 크기도 규모에 비해 작은 편에 속하는데 이는 나그네가 저택을 보고 발길을 돌릴까봐 일부러 대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진욱 기자 집주인의 너그러운 성품을 생각하며 월하문을 통과하면 시인, 묵객이 남긴 여러 글씨와 함께 활래정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처마 곳곳에 다양한 ‘활래정’ 편액이 6개나 걸려 있다. 1816년 지어진 활래정은 정자 건물의 반이 연못에 뿌리박은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고, 물 위에 떠있는 누마루와 온돌방, 다실로 구성돼 있다. 연못 내 작은 섬과 마당을 이어주는 목교(木橋)는 6·25전쟁 직후 망가져 철거된 후 지난 2011년 복원됐다. 벽이 없는 활래정은 문을 모두 열면 정자에 앉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수려한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활래’는 서쪽 태장봉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이 연못을 거쳐 경포호수로 빠져나간다는 의미이다. 이곳에서는 시 한 수가 저절로 나올듯 바라보는 풍광이 빼어나다. <선교장의 특이한 문>/이진욱 기자 네모난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믿었던 당시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한국 민가정원 정자의 극치를 이루는 활래정을 지나면 소나무 숲 아래 고색창연한 건물과 담, 대문들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안내하는 듯하다. 선교장의 본채 건물들은 담장과 대문 1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전면의 행랑채에는 문이 2개 있다. 신선이 기거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선교유거’(仙嶠幽居)란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은 남자만 드나드는 곳이다. 여자와 하인이 드나들 수 있는 평대문에는 내외벽이 있어 안채와 밖이 구분된다. 솟을대문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평대문 내외벽과 안채(主屋), 동별당(東別堂)이 있다. 선교장 최초로 지어진 안채는 종부(안방마님) 거처이며, 집의 전체 규모에 비해서는 소박한 건물이다. 안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ㄷ자 형태로 대청 양쪽에 온돌방과 고방이 있다.세간을 보관하던 고방은 여름철이면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여자들의 은밀한 공간이기도 하다. 안채의 오른편에 동별당, 왼편에는 서별당(西別堂)이 이어져 있다.동별당은 집안의 여자들과 여자 손님이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마루의 모든 벽체가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의 성품과 면모를 보여준다. 동별당에는 ‘오은고택’(鰲隱古宅) 현판이 걸려 있는데 오은은 이내번의 손자 이후(李后)의 호이다. 동북쪽 산 중턱에는 선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남자들의 서재로 사용되었던 서별당은 안채와 담으로 구분되어 있고, 중간에 작은 문 하나가 나 있다. 담장은 고개를 내밀어 소통하기에 충분하도록 야트막하다. 서별당 아래의 연지당(蓮池棠)은 집안의 홀로된 여인들이 안채의 살림을 도와가며 지내던 곳이다. 앞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반입되는 재물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현재 서별당과 연지당은 한옥스테이 장소로 사용된다.솟을대문을 지나 왼편으로 들어서면 선교장의 중심인 열화당(悅話堂)을 만난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구조인 열화당은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로,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을 담고 있다.지난 1815년 완공된 열화당의 특징은 툇마루 앞에 설치된 동판 구조물인 차양으로, 한말에 선교장에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 사람들이 보답으로 지어준 것이다. <선교장 열화당>/이진욱 기자 심명숙 문화해설가는 “학식이 높고 귀한 손님들만 이 사랑채에 머물게 했다”면서 “지난 7월 열화당 건립 200주년을 기념해 대관령국제음악제 저명연주가 시리즈 ‘강원’이 이곳에서 열렸다”고 설명한다.열화당 뒤편 초정(草亭)은 인상적이다. 열화당 후원의 정자로, 시문을 짓고 책을 읽던 곳이다. 또한 초가에 살고 있는 소작인들의 애환과 삶을 공감하고 검소와 베풂의 덕을 수련하도록 소박하게 지었다고 한다. 원추리 군락지가 조성돼 있어 ‘녹야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원추리의 야생력과 번식력이 선교장가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선교장 안채 부엌>/이진욱 기자 열화당 부속건물인 중사랑은 풍류객들과 교분을 나누던 곳이다. 23칸의 행랑채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시인, 묵객과 집안일을 하던 집사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이밖에도 안팎으로 볼거리가 많다.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교장에는 곳간채, 홍예헌, 자매재, 초가, 선교장 박물관 등이 있다. 1908년 곡식창고인 곳간채를 개조해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를 설립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폐교됐다.활래정의 단골손님이었던 몽양 여운형이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현재 선교장 생활유물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교장 매표소 인근의 선교장 박물관에는 300년 집안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도 만년에 이곳에 들러 ‘홍엽산거’(紅葉山居) 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편액으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선교장이 건축되기 전부터 자생한 노송 수백 그루가 우거져 있는 선교장 뒷동산 솔숲 길을 걸으면 솔향기와 전통가옥의 멋을 더욱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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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여행> 특별한 유스호스텔 캠프 그리브스(파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세계 유일의 분단 현장’이라고 흔히 표현하는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는 민간인출입통제선 지역으로 경기도와 강원도에 걸쳐 있다. DMZ는 1953년 7월 유엔과 북한, 중국이 서명한 정전협정으로 규정된, 남북한의 적대적 행위 억지 공간이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 방향으로 2㎞, 동서 248㎞를 가로질러 만들어 놓은 비전투지역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북한 모두 군대를 주둔시켜 총을 겨누는 긴장의 공간이다. 이진욱 기자DMZ는 한편 자연생태계의 보고(寶庫)로 주목받고 있다. DMZ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여행에 제한이 많지만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와 분단의 아픔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곳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관광지 중 하나다.경기도는 분단의 상징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DMZ 활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캠프 그리브스(Camp Greaves)는 6·25전쟁 정전협정 후 지난 1953년 7월 30일부터 50여 년 간 미군 2사단이 주둔해오다 2007년 우리나라 정부에 반환된 시설이다. 이진욱 기자 캠프 그리브스는 반환된 이후 역사·문화적 가치에도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경기도와 파주시가 군 당국을 끈질기게 설득해 민간인을 위한 평화안보 체험시설로 증·개축했다. 지난 2013년 7월 개관한 ‘캠프 그리브스 DMZ 체험관’은 지난 10월 말까지 1만6천246명이 이용했다. ◇ DMZ 숨결 느끼며 하룻밤 보내는 공간 서울에서 쭉 뻗은 자유로를 40분 남짓 달리면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임진각 평화누리에 닿을 수 있고, 간단한 절차를 밟으면 민통선 내의 도라산역·도라전망대·제3땅굴 등 평화안보 관광지도 둘러볼 수 있다. 긴장감이 감도는 판문점, 길게 뻗은 철조망, 그 안에 묻힌 1만여 개의 지뢰 등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간 충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비무장지대는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다. 민간인이 이곳을 방문하려면 사전신청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임진강역이나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신원조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 캠프 그리브스 유스호스텔은 민통선 안에 자리 잡은 유일한 안보체험 숙박시설이다. 이진욱 기자이진욱 기자 높고 푸른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자유로를 따라 달려 ‘통일의 관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통일대교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임진강변의 황금 들녘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지만 차량을 통제하기 위해 겹겹이 쳐진 바리케이드는 분단된 현실을 차갑게 일깨웠다. 초소의 군인들이 얼굴과 신분증을 하나하나 대조한다. 외국인 관광객을 태운 버스와 화물차량이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으로 들어가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통선을 넘어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다가간다는 생각에 약간의 긴장감도 감돈다. 신분 확인을 마친 뒤 통일촌을 지나 3분 정도를 더 달려 캠프 그리브스에 도착했다. 이진욱 기자 미군 장교 숙소 한 동을 증·개축한 ‘캠프 그리브스 DMZ 체험관’은 1층에 사무실, 2·3층에 숙소, 4층은 강당과 식당으로 꾸며졌다. 숙소는 옛 군대 내무반을 재현해 놓았고 식사 때는 병영식당처럼 식판에 배식된다. 캠프 그리브스 안보체험에는 당일과 1박 2일, 2박 3일 프로그램이 있다. ‘캠프 그리브스 DMZ 체험관’ 홈페이지(www.dmzcamp131.or.kr)를 통해 예약할 수 있으며 30명 이상 단체만 이용할 수 있다. 캠프 그리브스 당일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 40여 명은 관광버스로 캠프 그리브스에 도착, 오전에 제3땅굴, 도라전망대, 도라산역, 도라산 평화공원을 차례로 견학했다. 이때 워크북을 활용한 ‘DMZ 1129’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며 분단의 아픔을 가진 DMZ의 역사와 지리 등을 배웠다. 오후에는 캠프 놀이마당과 평화기원 리본 달기 등이 진행됐다. ‘1129’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3일까지의 기나긴 전쟁 기간을 의미한다.이외에도 불후의 명작(전쟁 영화의 다음 장면을 상상하여 스톱모션 무비 만들기), 나라사랑 콘서트(1사단 장병들의 안보교육과 뮤직 콘서트), 통일 기원 미니 장승 솟대 만들기, 도전 DMZ 골든벨, DMZ 자전거 투어, DMZ 철책선 걷기, DMZ 초콜릿 만들기, DMZ 티셔츠 만들기 등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반세기 넘게 주한 미군 최전선 기지였던 캠프 그리브스에는 DMZ 체험관 이외에 미군이 쓰던 생활관과 체육관, 탄약고, 장교 부사관 숙소, 정비소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닐하우스 모양으로 지붕을 함석으로 만든 막사인 ‘콘센트 막사’는 거미줄이 무성한 채 텅텅 비어 있었고, 다른 건물들도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황량한 모습이었다. 체육관과 탄약고는 DMZ국제다큐영화제 행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기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캠프 그리브스 DMZ 체험관’은 세계 유일의 분단 현장인 DMZ를 체험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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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상봉> 다시 아들 알아본 치매 노모 "죽어도 소원 없어"(종합)<이산상봉> 아이고, 우리아들(금강산=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김월순(93) 할머니가 북측에서 온 아들 주재은(72) 할아버지를 만난 뒤 기쁨에 겨워 오열하고 있다.김월순 할머니 작별상봉서…북측 아들 주재은 씨 "통일되면 만나요" 왈칵 눈물 (금강산=연합뉴스) 공동취재단·임은진 기자 = "고마운 세상이야. 우리 재은이를 만나고…. 내가 죽어도 소원이 없어."헤어지는 순간, 다행히 아들을 다시 알아본 구순(九旬)의 노모는 아들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이제 정상이시네." 60여 년 만에 어머니가 불러주는 이름에 아들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치매로 앞에 앉은 아들조차 인식하지 못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던 김월순(93) 할머니가 26일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작별상봉에서 다시 아들을 알아보고는 눈물을 흘렸다.그러고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붉은색 알이 박힌 금반지 하나를 빼서 북측에 두고 온 장남 주재은(72) 씨에게 건넸다.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에게 주려고 오랜 시간 끼고 있던 반지다. 재은 씨는 괜찮다고 한사코 사양했으나 김 할머니는 어쩌면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일 수도 있는 반지를 아들의 손에 꼭 쥐여줬다. "안 필요해도 내가 주고 싶어. 갖다 버리더라도 갖고 가라."그러면서 긴 세월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던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쓰다듬었다. 김 할머니의 목에는 전날 개별상봉 때 재은 씨가 선물한 연갈색의 꽃무늬 스카프가 곱게 자리했다.김 할머니는 상봉 첫날인 지난 24일 재은 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다 25일 개별상봉 때 잠시 알아보기도 했지만, 이후 열린 공동중식과 단체상봉에서는 "이이는 누구야?"라며 다시 알아보지 못했다.그러다 상봉 마지막 날인 이날 아들과 기나긴 이별을 준비하려는 듯 다시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함경남도 갑산군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1·4 후퇴 때 재은 씨를 친정에 맡긴 채 둘째 아들 재희 씨만 업고 먼저 피난 간 남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재은 씨에게 "열흘만 있다 올게. 갔다 올게"라고 하고 나간 것이 60여 년이 될 줄 몰랐던 것이다.어느덧 칠순의 노인이 된 재은 씨는 어머니에게 부부증명사진을 보여주며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다시 들려줬다. 북쪽에서 낳은 아이들도 장성해 대학도 보내고 교수도 됐다고 자랑했다. "통일되면 우리 집에 와서 살아요, 할머니. 우리는 할머니 고향에서 살아요"라는 북측의 손녀의 말에 할머니는 잠시 옛날 생각이 나는 듯 "고향에서 왔어? 기가 막히는구나…"라며 먼 산을 바라봤다.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작별의 시간.북측의 장남은 몸이 편치 않은 어머니가 타고 갈 휠체어를 묵묵히 폈다. 그리고 한동안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 건강하십쇼. 통일되면 내가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한 재은 씨는 남측 동생 재희 씨를 부둥켜안으며 "건강하게 살아라"라고 당부했다. "형, 마지막이 아니야. 이건 시작이야, 형이 어머니 모셔야 해. 왜 내가 어머니를 모셔. 장남인 형이 모셔야지. 나 이제 안 모실 거야." 동생은 형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정을 부리며 오열했고, 형은 그런 동생에게 "알았다, 알았다"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이내 마음을 강하게 먹은 재은 씨는 "어머니, 살아 있으십쇼"라며 어머니에게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인사를 했다.김 할머니는 그러나 그러는 아들이 낯선 듯 "같이 안 가? 나 데리고 집에 갈 거지?"라며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다시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에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모시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통일되면 만납시다, 어머니"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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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도 건재한 한양도성, 60년前 미군 렌즈로 확인듀이 맥린 박사, 남산 일대 한양도성 사진 공개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둔 서울성곽(한양도성)의 한국전쟁 중 모습이 당시 참전한 미군 병사의 렌즈에서 뒤늦게 확인됐다.전쟁통인데도 남산자락에 건재하게 서 있는 성곽의 모습과 잔잔한 풍경이 인상적이다.1951년부터 1953년까지 미8군 제3철도수송단에서 상병으로 근무한 듀이 맥린(Dewey McLean, 82) 박사는 12일 연합뉴스에 1952년에 찍은 한양도성 사진 5장을 보내왔다. 미국 버지니아텍에서 세계적 지질학자로 이름을 남긴 맥린 박사는 참전 당시 캐논의 1949년 IIB(Version 1) 카메라로 250장의 한국 풍경·인물 컬러사진을 남겼으며 그 중 일부는 최근 소개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사료로 확보했다.이번에 새로 발견된 첫 번째 사진은 당시 5년제였던 용산중학교 운동장 옆 언덕 위에서 남산 정상을 보고 찍은 사진으로 산의 왼쪽 등줄기로부터 정상까지 성곽이 선명하게 보인다. 운동장에 외롭게 선 축구 골대도 인상적이며 왼쪽 주택들은 후암동, 오른쪽은 해방촌이다. 두 번째 사진도 비슷한 위치에서 찍은 것으로, 황량한 겨울 풍경과 성조기 뒤로 산등성이를 따라 줄지은 성곽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OLD GLORY, 3rd TMRS HEADQUARTERS COMPOUND, YONGSAN <<Dewey McLean 박사 제공>>세 번째 사진은 지금은 사라진 일제 조선신궁 남쪽에서 남산을 향해 찍은 것으로, 허물어진 데 없이 제자리를 지킨 성곽의 모습이 좀 더 크게 확인된다. KOREAN HOUSE AND ANCIENT SEOUL WALL ON NAMSAN MOUNTAIN <<Dewey McLean 박사 제공>>네 번째 사진은 회현자락에서 본 성곽의 모습이다.마지막 사진은 조선신궁 바로 위 성곽에서 포즈를 취한 맥린 박사의 모습인데, 뒤편에 무너짐 없이 빼곡하게 쌓인 성곽의 돌들이 인상적이다. SEOUL CITY WALL, NAMSAN MOUNTAIN <<Dewey McLean 박사 제공>>사진들을 찍은 맥린 박사도 사진을 찍은 후 60여 년이 지난 최근까지 사진에 보이는 성곽이 한양도성이란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맥린 박사는 재미 민간사학자 유광언씨로부터 사진에 한양도성이 있는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수일 작업 끝에 오래된 사진들을 어렵게 확대하는 데 성공, 한양도성의 모습을 확인했다고 밝혔다.세 차례 뇌수술 후 회복 중인 맥린 박사는 "다시 한국을 찾을 수 있다면 남산에 올라 현대의 서울을 보며 머릿속 옛 모습과 비교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유씨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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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바다 앞 산고개를 굽이굽이 '환상의 산복도로'부산만 있는 특별한 길…6·25전쟁·공업화 거치며 자연스레 만들어져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부산의 원도심에는 '산만디'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복도로가 있다.산만디는 '산고개'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산복도로는 6·25전쟁과 부산의 공업화를 거치며 만들어진 부산만의 독특한 길이다.그곳에는 피란민의 안식처, 경제성장기 이주민의 정착지 역할을 한 달동네가 겉모습을 바꾼 채 자리 잡고 있다.산복도로의 관광거점과 명소를 순환하는 '만디버스'를 타면 부산의 역사를 느끼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산만디에서 이름을 딴 산복도로 투어버스 '만디버스'는 올해 초부터 준비를 거쳐 9월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지역 주민, 관광업 종사자, 운수업 종사자 등 다양한 계층의 조합원 544명이 참여한 협동조합이 결성돼 지역 활성화와 관광 수익을 꾀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협동조합은 허가권이 있는 부산시와 함께 시범 운영을 거쳐 9월부터 만디버스를 본격 운행하고 있다. 최대 탑승인원이 18명으로 크게 순환형 코스와 테마형 코스로 나뉘어 부산역 광장에서 탑승한다.순환형 코스는 매주 목, 금, 토, 일 하루 8회씩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부산역을 출발, 까꼬막∼이바구공작소∼금수현의 음악살롱∼닥밭골 행복마을∼동아대 석당박물관∼비석마을∼감천문화마을∼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갔다가 되돌아온다. 테마형 코스는 금, 토, 일요일에 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6시 세 차례 운행하는데, 해설사가 탑승해 지역 명소를 돌아보며 숨은 이력이나 명소와 관련된 해설을 들을 수 있다.특히 만디버스가 운행하는 구간은 동구와 중구, 서구, 사하구까지 바다와 도심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어 짧은 시간 부산을 느끼고 싶은 관광객에게 제격이다.만디버스 요금은 1인당 1만원이다.만디버스의 주요 운행코스인 산복도로를 찾은 관광객은 그 매력에 빠져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 동구가 산복도로를 방문한 관광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64%가 '다시 오겠다'고 답했다. 재방문 이유로는 '경치·경관이 좋다'는 답변이 41.9%였다.만디버스를 타면 가슴이 뻥 뚫리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물론 산복도로의 여러 명소를 두루 돌아볼 수 있다.동구에는 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유명한 김민부 시인을 기린 '김민부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북항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해방부터 6·25전쟁, 월남 파병까지 부산의 역사와 산복도로 자료를 수집한 '이바구 공작소'도 눈길을 끈다.만디버스 코스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평생 가난한 이웃에게 의술을 펼친 장기려 박사의 유품 등을 모아놓은 '더 나눔' 기념관도 돌아볼 만하다. 경남여고 교장을 지낸 시인 유치환의 이름을 본떠 만든 '유치환의 우체통'은 시원스런 풍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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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뒷이야기> '서부전선' 제3의 주인공, 25t 탱크(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24일 개봉한 '서부전선'(제작사 하리마오픽쳐스)은 연기파 배우 설경구와 떠오르는 샛별 여진구가 '브로맨스'(브러더+로맨스) 호흡을 맞춘 영화다. 두 배우의 이름 끝 자를 딴 '구구 케미(케미스트리)'라는 애칭도 생겼다.이들 외에 '서부전선' 제작진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탱크다.휴전 3일 전, 전쟁의 운명을 가를 일급 비밀문서를 전달할 임무를 받은 남복(설경구)과 탱크를 책으로만 배운 영광(여진구)이라는 남북 '쫄병'이 부딪히는 이야기인 만큼, 탱크는 주인공들이 대결하는 주요 무대인 동시에 영광에게는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다. 제작진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쓴 T-3485 기종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여주려 3개월의 설계와 2개월의 제작을 거쳐 폭 3m, 높이 2m, 포신 길이 7m, 무게 25t짜리 탱크를 완성했다. 탱크는 촬영을 위해 실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시각특수효과(VFX)팀 2명만 이 탱크를 몰 수 있었지만, 촬영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천성일 감독과 거의 모든 스태프가 운전할 수 있게 됐다. 특히 탱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여진구는 적극적으로 탱크 모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실제로 탱크를 만들었더라도 컴퓨터그래픽(CG)은 필수였다. '해적:바다로 간 산적'에서 바다를 휘젓는 고래를 만들어낸 팀이 '서부전선'에서 다시 뭉쳐 포격 장면부터 무스탕기와의 추격전까지 탱크의 움직임을 구현했다.탱크와 마찬가지로 무스탕기 역시 캐릭터의 감정에 바탕을 뒀다. 소년병 영광이 첫 전투에서 무스탕기를 겪고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는 장면이었기에 영광이 불안해하는 심리에 초점을 맞춘 CG 작업이 이뤄졌다. '해적'으로 청룡영화상 기술상을 받았던 강종익 슈퍼바이저는 "관객이 CG를 즐기기보다 영화에 녹아들어 CG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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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교민행사에 눈길 끈 북한인권 사진전(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이동경 특파원 =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0일(현지시간) 열린 이민 50주년 행사에 북한 인권 실상 사진전이 선보여 현지인들의 관심이 쏠렸다.이북5도민회 아르헨티나연합회가 준비한 이 사진전은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중앙 무대 오른쪽에 마련됐다. 전시회는 북한의 인권 실상에 대해 검증된 사진 120여 장 중 회령 등 정치범 수용소 4곳의 실태와 아동 및 여성 학대, 북한 고위층 숙청, 탈북자들을 대상을 한 잔혹 행위 등 4가지 주제로 40장을 선별했다. 탈북자 단체가 발행한 북한 인권 실상에 대한 설명문 1천 부와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을 부탁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 볼펜이 금세 바닥나는 등 현지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아르헨티나 텔람(Telam) 통신사의 한 기자는 사진 내용을 보고 이북5도민회 관계자와 즉석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또 아르헨티나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의 보좌관도 전시장을 방문해 북한 인권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을 표시했다.이북5도민회 아르헨티나 연합회 장영철 회장은 "아르헨티나에도 이북 5도민 출신들이 많다"며 "북한 동포들이 최소한의 인권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진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한인 이주 역사는 1965년 10월 13가구 78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농업 이민을 온 것이 최초라고 기록되고 있지만, 실제로 는 그에 앞서 6·25전쟁 종전 후인 1956∼1957년 제3국행을 택한 포로들이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고 장 회장은 설명했다.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북한 출신 실향민은 1천 가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한편, 북한은 1977년 아르헨티나로부터 구매한 곡물의 대금을 내지 않은 채 대사관 건물에 방화하고 아무런 통보 없이 철수를 함으로써 아르헨티나와 국교가 단절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