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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안흥창' 추정 터 발굴…부안 유천리 도요지서 확인"고려청자·세곡 운송 거점 역할"…고려 12조창(漕倉) 중 하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사적 제69호)에서 조세로 거둬들인 현물과 청자 등을 보관하던 '조창'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굴됐다. 고려시대 '안흥창' 추정 건물터(재)전북문화재연구원은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에서 고려시대 각 지방에 있던 12개의 조창(漕倉) 가운데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으로 추정되는 기와 건물터 2곳을 발굴했다며 현장을 공개했다.유천리 유적지에서는 통상 가마터에서 발견되지 않는 정면 2칸, 측면 2칸(가로 3.8m, 세로 3,8m)의 정방형과 정면 1칸, 측면 1칸(가로 2.9m, 세로 3.3m)의 장방형 기와 건물터 2곳이 발굴됐다.전북문화재연구원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등의 기록을 토대로 이 건물터를 안흥창으로 추정하고 있다.고려사는 안흥창이 각 지방에 있던 12개의 조창 가운데 조운의 거점 역할을 했다고 적혀 있으며 동국여지지는 안흥창이 지금의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토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조창은 조세로 거둔 현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기 위해 수로(水路) 근처에 설치한 창고와 이 일을 담당하던 기관을 일컫는다.전북문화재연구원은 고려 때 세곡과 함께 청자도 중앙으로 운송했기 때문에 안흥창이 가마터 옆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유천리 가마터 출토유물 전북문화재연구원 양영주 책임연구원은 10일 "안흥창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터는 부안지역 청자 유적지의 성격과 위상을 밝히는데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유천리 가마터에서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상감용무늬매병의 초벌구이 파편 등 청자 파편이 무더기로 발굴됐으며 가마 등이 확인됐다.발굴조사는 부안군이 의뢰해 전북문화재연구원이 8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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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400년 전 백제 장식기와 '치미' 복원…"새가 비상하는 듯"(서울=연합뉴스) 백제 위덕왕이 577년 세운 부여 왕흥사 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最古)의 '치미'가 복원·공개됐다. 치미는 전통 건축물에 사용되는 장식기와로, 용마루 끝에 설치해 위엄을 높이고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한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13∼2014년 발굴조사 중 승방으로 보이는 건물터의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발견한 치미 한 쌍을 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고대 건물터에서 용마루 좌우의 치미가 한꺼번에 나온 것은 처음이다.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 왕흥사지 치미는 이 절이 창건된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룡사지 치미, 부여 부소산 폐사지 치미, 익산 미륵사지 치미 등보다 제작 시기가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왕흥사지 치미. 승방 건물터 남쪽과 북쪽에서 나온 치미를 합친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왕흥사지 치미는 출토 당시 지붕에서 떨어져 조각난 상태로 땅에 묻혀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를 수습해 남쪽 치미는 상부, 북쪽 치미는 하부를 복원하고 삼차원 입체영상 기술로 상하부 전체를 복원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복원 이미지에 따르면 왕흥사지 치미는 높이가 123㎝, 최대 너비가 74㎝이다. 왕흥사지 치미는 전체적인 생김새가 꼬리를 세운 새가 비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연꽃무늬·구름무늬·초화(草花)무늬 등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왕흥사지 치미는 전체를 만든 뒤 상부와 하부를 분리해 따로 구워낸 것으로 판단된다"며 "중국 남조척(南朝尺)의 1자가 약 24.5㎝인데, 이 척도를 적용하면 왕흥사지 치미는 높이가 5자이고 너비는 3자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왕흥사지 치미에 대해 "백제 사비 도읍기의 기와 제작기술과 건축기술, 건축양식 등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평가한 뒤 "주로 사찰의 금당(본존불을 안치하는 중심 건물)이나 강당 터에서 나온 치미가 승방 터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당시 승려의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날 공개된 왕흥사지 치미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9일 개막하는 특별전 '세계유산 백제'에 전시될 예정이다. 부여 규암면에 있는 왕흥사지(사적 제427호)는 사비 백제의 왕궁터로 알려진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에서 보면 금강 건너편에 있다. 지난 2007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보물 제1767호)가 출토돼 577년에 창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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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대가야로 떠나는 여행 '고령 지산동 고분군'(고령=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하나는 “하늘신 이비가와 가야산신 정견모주 사이에서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가 깨져 동자 6명이 됐는데,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는 다섯 가야의 왕이 됐다”는 것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사진/전수영 기자 가야는 초기에는 금관가야, 후기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로 나뉜 바람에 하나의 통일왕국을 건설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대가야는 쇠를 바탕으로 한 무력을 내세워 562년 멸망 때까지 경남 서남부와 호남 동부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 세력이었다. 대가야는 주변의 철광산을 개발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어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군대의 힘을 키웠다. 대가야는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으로서 백제ㆍ일본ㆍ중국 등과 활발히 교역하는 등 급속한 경제 발전과 함께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삼국사기‘고령군조’에는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16대 520년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대가야는 554년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고,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대가야를 정복한 신라는 대가야의 지배층을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했고, 사료조차 제대로 남겨 두지 않았다. 역사는 때론 승리의 역사만 남듯이 대가야 역사는 컴컴한 무덤 속에 묻혔다.신윤선 문화관광해설사는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기록만 가득하고, 고대문화의 한 축을 이루었던 대가야는 그저‘철의 왕국’쯤으로 여기면서 베일에 가린 수수께끼 역사로 취급한다”면서 “일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덧씌워짐으로써 가야 역사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고 말한다.지산동 고분군(池山洞 古墳群)은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들이 묻힌 신성 구역으로, 대가야 국가의 융성을 무언으로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인 1906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가 처음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대부분 유물은 일본으로 유출됐다. 해방 이후 1977년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44호와 45호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 주산 능선 아래에 위치한 대가야 왕릉전시관은 지산동 고분군 44호의 내부를 원형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당시 무덤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부장품)를 직접 볼 수 있어서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무려 704기에 달하는 지산동 고분군은 지난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과 2015년 우선목록에 등재됐고, 2017년 2월 정식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대가야 왕릉전시관. 사진/전수영 기자 ◇ 대가야 지배층의 독특한 내세관 반영한 고분 사적 제79호로 지정된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의 남동쪽 능선 위에 분포하고 있다. 주산 구릉 곳곳에는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른 수많은 고분이 불쑥불쑥 솟아오른 듯 무리를 짓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먼발치에서 보는 풍경도 압권이지만 고분 사이를 걸어 다니면 대가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더 좋다.대가야 왕릉전시관을 지나‘대가야 고분관광로’라는 안내판을 따라 주산(主山ㆍ310m) 능선에 올랐다. 주산 정상까지 1.3㎞라고 표시돼 있다. 야트막한 능선을 오르니 이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고아동 벽화고분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주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아기자기한 무덤들 사이사이를 걷는 맛이 꽤 이색적이다. 등산로가 가파르지 않아서 고분 사이를 가볍게 걸어 다니며 대가야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이곳 고분군은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서기 400년을 전후해 조성돼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대략 160여 년간 조성됐다. 가야 왕들이 잠든 고분 사이를 거닐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대가야읍이 한눈에 잡힌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크고 작은 고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주의 무덤은 대부분 평지에 있는 것에 반해 고령의 무덤군은 산 능선과 중턱을 따라 오밀조밀 이어져 있다. 능선 위로 올라갈수록 무덤의 크기가 커지는데 이는 왕의 힘이 세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봉분이 없는 김해의 대성동 고분군과 달리 높고 봉긋한 봉분이 많다. 특히 주산 아래 능선을 따라 형성된 고분군은 높이와 규모가 웅장하다. 직경 40m 이상이 1기, 30∼40m 5기, 25∼30m 6기, 20∼25m 6기, 15∼20m 18기, 10∼15m 87기, 10m 미만 581기 등이다. 대가야 왕릉전시관. 사진/전수영 기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순장이라는 관습으로 허물고자 했던 무덤들을 둘러보다 보면 주산 정상부에 봉분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군이 버티고 있다. 그중 지산동 44호와 45호 고분은 베일에 가린 대가야의 역사가 빛을 보게 되는 획기적 계기가 됐다. 44호와 45호 고분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로, 대규모 순장 뼈와 토기, 철기 등이 쏟아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44호 고분은 지산동 고분군에서 규모가 큰 것에 속하며 능선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있다. 이 고분은 무덤의 밑지름이 27m에 이르며 가운데에 왕이 묻힌 큰 돌방이 있고, 주위에 토기류·마구류·장신구 등 부장품을 넣는 돌방 두 개와 순장자들의 무덤 여러 개가 있는 형식으로 돼 있다. 돌방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순장자의 작은 무덤이 32개나 있었다. 순장자 무덤에서는 남녀가 머리 방향을 반대로 한 채 반듯이 누워 있는 인골, 30대 남자와 8세 여아가 함께 묻혀 있는 인골 등이 나왔다. “한 사람의 주인공을 위하여 수십 명이 매장된 순장묘라는 특이한 내부구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비록 도굴을 당한 상태이지만 출토된 유물은 대가야를 새롭게 바라보는 주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게 신윤선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당시 왕의 죽음은 대규모 인력이 동원돼 지배체제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시신을 가매장한 뒤 묘터를 조성해 본매장을 하기까지는 인력 수십, 수백 명이 투입됐고 수개월이 걸렸다. 축조과정을 보면, 우선 왕이 죽으면 왕릉을 만들 위치를 정하고 주변을 잘 정비한다. 가운데에는 왕이 묻힐 큰 돌방과 그 옆에 껴묻거리를 넣을 돌방을 만들고 그 둘레에 순장자들의 무덤구덩이를 판다. 그 다음 주변 채석장에서 돌을 깨어와 돌방과 돌덧널에 둘렛돌을 쌓는다. 무덤 주위에는 둥글게 돌을 돌려 무덤 구역을 표시한다. 그리고 완성된 무덤방 속에 왕과 순장자를 껴묻거리와 함께 넣는다.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덮개돌을 올리고 제사상을 차린 후 제의를 지낸다. 마지막은 봉분 만들기인데 봉토를 쌓을 때는 일정한 두께로 흙을 편평하게 쌓아서 다지는 과정을 반복해 무덤을 완성한다.순장 당한 이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강한 몸부림이 있었을까. 신윤선 문화관광해설사는“왕이나 지배층이 죽었을 때 현세에서 그를 위해 봉사했던 시종이나 노비는 사후에도 왕을 받드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껴묻힌 것”이라며 “고분의 순장자는 금으로 된 장신구를 착용한 사람, 고리자루칼과 같은 무기를 지닌 사람, 마구류를 지닌 사람, 장신구나 무기를 전혀 지니지 않은 사람 등 다양한 직능의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한다. 김훈의 소설‘현의 노래’에는 순장 당하는 이들의 절규가 처절하게 묘사된다. “하늘은 파랬고, 가까웠다. 구덩이 속에 누운 여자가 그 하늘을 만져볼 듯 구덩이 밖으로 손을 뻗쳤으나 아무도 그 손을 본 사람은 없었다. 흔히 돌뚜껑이 덮이기 직전에 여자들은 가랑이 사이로 때아닌 생리혈을 왈칵 쏟아냈고 피 냄새를 맡은 개미들이 몰려들었다.”순장으로 죽어가는 힘없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악기를 다루어야 했던 우륵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45호 고분은 44호 고분에서 산 위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봉분 지름이 28m에 이른다. 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만들고 그 옆에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 돌방을 마련한 다음, 주변에 순장자들이 묻히는 무덤 11개가 만들어졌다. 45호 고분 위의 5호 고분은 봉분 지름이 49m에 달하는 가장 큰 고분으로 ‘금림왕릉’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산리 고분군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30호 고분은 1994년 발굴조사를 했는데, 가운데 큰 돌방을 만들고 그 옆에 딸린 돌방과 순장자의 무덤을 만들었다. 가운데 돌방의 바닥 아래에 또다시 돌덧널이 만들어져 무덤이 2층으로 되어 있다. 한편 무덤에서는 어린아이 뼈와 금동관이 나왔다. 그리고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이 새겨진 돌을 깨어 와 무덤의 뚜껑돌로 사용했다. 대가야 역사관. 사진/전수영 기자◇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온 1천500년 전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해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도 쏟아져 나왔다. 무덤과 그 속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대가야 양식’으로 말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을 알 수 있다.대가야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는 접시가 납작하다. 팔(八) 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에는 좁고 긴 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다. 긴목항아리에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 들어 몸체 부분과 S 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다. 장신구에서는 정밀한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화려함을,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투구에서는 무사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30호분과 32호분에서 나온 금관은 순금보다는 대부분 금동으로 만들어졌고 신라의 나뭇가지, 새 날개 모양 장식과 달리 풀잎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중 하나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 하나는 국보 138호로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돼 있다. 왕이 마셨던 우물. 사진/전수영 기자 고령에는 대가야의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사적 제165호로 지정된 ‘고아동 벽화고분’은 가야지역 유일의 벽화고분으로 유명하다. 1963년 10월에 발견된 고아동 벽화고분에는 분홍색, 녹색, 흑색, 갈색 등 다양한 색채로 그린 8엽 연화문이 남아 있다. 발굴 이전에 이미 도굴의 피해를 당했기 때문인지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고령초등학교에는 왕이 마셨던 우물인 왕정(王井)이 있고, 주산 정상부에는 사적 제61호로 지정된 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대가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가야역사관은 필수 방문 코스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된 대가야역사관에서는 대가야의 여명, 대가야의 성립,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 대가야 이후의 고령을 테마로 관람할 수 있다.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지난해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이번 가을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지산동 고분군을 따라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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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서 관청 추정 통일신라 건물지군 확인2천585㎡ 부지 안팎에 건물지 14개…토제벼루 50여점 출토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의 천년왕성인 경주 월성(月城, 사적 제16호)에서 관청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건물지군이 확인됐다.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3월부터 월성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해 중앙의 C지구에서 담으로 둘러싸인 동서 51m, 남북 50.7m, 면적 2천585㎡인 정사각형 부지 안팎에 있는 건물지 14개를 찾아냈다고 30일 밝혔다. 월성 C지구에서 나온 건물지군. [문화재청 제공]이곳에는 본래 정면 16칸, 측면 2칸 규모의 대형 건물을 포함해 건물 6동만 있었으나, 후대에 동쪽과 서쪽 담을 허물고 건물 8동을 증축한 것으로 드러났다.건물과 담의 건축 시기는 인화문(도장무늬) 토기와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 출토 유물을 통해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됐다.이번 조사에서 특히 관심을 끈 유물은 흙으로 만든 토제벼루 50여점이다.연구소는 월성 주변에 있는 동궁과 월지, 분황사에서 나온 토제벼루보다 양이 훨씬 많다는 점으로 미뤄 이번에 발굴된 건물지군이 문서를 작성하는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월성 C지구 출토 C지구 출토 벼루 다리편. [문화재청 제공]월성 C지구에서는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와 암막새 등 기와류, 다량의 토기도 출토됐다.전인은 궁궐 부속 관청인 와기전(기와나 그릇을 굽던 관아)에 속한 실무자, 본은 신라 정치체제인 육부 중 하나인 '본피부'(本彼部), 동궁은 태자가 머무는 궁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또 연구소는 탐색조사를 통해 월성 C지구에 통일신라시대 문화층(특정 시대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 2개와 신라시대 문화층 5개가 있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현재까지 확보된 유물 분석자료를 보면 월성은 4∼9세기에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 있었으며, 신라가 멸망한 뒤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월성 C지구 출토 명문기와와 막새. [문화재청 제공]한편 지난해 하반기 조사를 시작한 월성 서쪽 A지구에서는 8세기 전후에 성벽이 보수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구간에 조선시대 이후 작은 자갈을 깔아 조성한 폭 3m의 통행시설도 발견됐다.나아가 서쪽 성벽 안쪽의 평탄한 땅에서는 지금까지 출토된 적이 없는 용도 불명의 특이한 기와가 나왔다.이 기와는 신라가 처음 기와를 사용한 6세기 전후에 제작된 무문(無文·민무늬) 암막새와 비슷하나, 제작 기법이 달라 주목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월성은 제5대 파사왕 22년(101) 축성을 시작했으며,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궁성으로 쓰였다.문화재청은 지난 2014년 12월 개토제를 시작으로 3개월간 시굴을 한 뒤 지난해 3월 본격적인 발굴에 돌입했고, 20만7천㎡ 면적의 월성을 A∼D지구로 나눠 발굴하고 있다. 현재는 C지구와 A지구의 성벽, 문지를 조사하고 있다. 경주 월성.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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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완도 법화사 건립했나"…완도군 법화사지 재발굴(완도=연합뉴스) 박성우 기자 =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 대사가 터만 남아 있는 사찰 법화사도 건립했을까? 완도군이 전남도지정 기념물 제131호인 법화사지를 재발굴한다.23일 완도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때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 대사가 당시 세웠다고 전해지는 완도읍 장좌리 461 일원의 법화사지를 재발굴해 청해진 시대와의 연관성을 증명할 계획이다. 군은 입찰을 통해 문화재문기관을 선정, 상반기 중 발굴에 들어갈 계획이다.법화사지는 문화재연구소에서 1990년 청해진 유적을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2차례에 걸쳐 발굴했다. 발굴 결과 진도 용장산성 유물과 동일한 고려시대 유물과 함께 주름무늬 토기병편과 해무리굽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주름무늬 토기병편과 해무리굽 청자편 유물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만 할 뿐 입증을 하지 못하면서 청해진 시대와의 연관성도 확실히 증명되지 못했다.일부 지역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 법화사지 위치가 장좌리와 연접한 죽청리라는 주장이 일자 2011년 죽청리 절터에 대한 발굴도 벌였으나 조선 숙종 시대의 유물만 발굴됐다. 지난 1월 2차 발굴도 했지만 1차 발굴 때와 동일한 유물이 나오면서 청해진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이번 재발굴은 1990년 발굴시 주름무늬 토기병편과 해무리굽 청자편이 출토된 지역을 중점 대상으로 하면서 당시 확인하지 못했던 사찰터 후면부도 포함한다.군은 법화사지와 청해진시대의 연관성이 증명되면 현재 추진 중인 청해진 유적지 법화사 재건 사업, 세계 해양영웅 교육전시관 건립 등 장보고 대사 선양사업 추진에 큰 동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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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강' 태화강 100리길을 걷다.울산 대표 관광지·문화유산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둘레길 (울산=연합뉴스) 김용태 기자 = 울산 도심을 가로지르는 태화강을 '생명의 강'이라고 부른다. 태화강 대공원 전경(연합뉴스 자료사진)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태화강 오수가 흐르고, 죽은 물고기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그러나 울산시와 시민의 노력으로 맑은 수질을 회복해 지금은 연어와 수달 등 다양한 생명의 터전이자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울산의 젖줄이 됐다.강을 따라 걷는 길이 '태화강 100리길'이다.이 길은 동해와 만나는 강 하류에서 출발해 강의 발원지인 백운산 탑골샘까지 이어져 있다.특히 '울산 12경'인 십리대밭과 선바위, 국보인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등 울산을 대표하는 관광지와 문화유산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울산시는 2013년 1월부터 9월까지 5억원의 예산을 들여 단절된 길을 정비하고, 이정표와 해설판을 세워 이 길을 조성했다.길은 4개 코스에 총 48㎞이다. 걷는데 16시간 이상 걸린다.한꺼번에 전 코스를 답사하기보다 한개 코스씩 완주하는 것을 추천한다. 평지가 많아 느긋하게 걸으면 어렵지 않게 완주할 수 있다. 태화강 떼까마귀 군무(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심에서 감상하는 철새 군무 태화강 100리길은 강이 바닷물과 섞이는 하류 명촌교에서 시작한다. 1코스는 이곳에서부터 태화강 대공원을 거쳐 중류인 울주군 망성교까지다. 거리는 15㎞ 정도며 5시간이 걸린다.이 코스는 도심을 걸으면서도 억새길, 십리대밭, 삼호대숲, 선바위 등 태화강 주변의 자연경관과 생태 환경을 만끽할 수 있다. 태화강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표 코스이기도 하다.먼저 명촌교에서 출발하면 강을 따라 억새밭이 펼쳐진다. 가을이 되면 억새의 물결로 은빛 장관을 이룬다.조금 더 걸어가면 울산의 대표 공원인 '태화강 대공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계절마다 각양각색의 꽃이 만개해 시민의 휴식처가 된다. 요즘은 타지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주변에서는 태화강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 펼쳐진다. 바로 까마귀 군무다.시베리아와 만주에 서식하는 떼까마귀와 갈까마귀는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먹잇감이 풍부한 태화강변에서 서식한다. 겨울에 이곳을 찾는 까마귀는 5만 마리로 국내 최대 규모다.낮에 먹이를 찾아다니던 까마귀들은 해가 질 무렵에 둥지가 있는 삼호대숲으로 돌아오는데, 수만 마리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태화강 상공을 빙글빙글 도는 장관이 펼쳐진다. 태화강 삼호대숲 위 백로(연합뉴스 자료사진)겨울 동안 까마귀의 보금자리였던 삼호대숲에는 여름이 되면 수천마리의 백로가 찾아오기도 한다. 태화강 전망대 등에서 이들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강 중류로 더 올라가면 회귀 연어를 볼 수 있는 점촌교가 있으며,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며 물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선바위를 만날 수 있다. 거북 모양의 반구대(연합뉴스 자료사진)◇ 선사시대로 시간여행2코스는 망성교에서 출발해 사연댐을 지나 국보인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둘러볼 수 있는 구간이다. 대곡박물관까지 약 15㎞로 5시간 30분이 소요된다.2코스부터는 본격적으로 울산 도심을 벗어나 태화강 상류가 있는 울주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망성교에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연호의 전경이 펼쳐지고 한실마을을 지나면 반구대에 도달한다.반구대는 반구산의 한 끝자락에 형성된 기암절벽과 돌 틈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그 아래를 흐르는 대곡천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절벽을 이루는 바위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 엎드린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반구대란 이름이 붙여졌다. 반구대 암각화(연합뉴스 자료사진)반구대에는 국보 제285호인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망원경을 통해 바위를 들여다보면 고래를 비롯한 바다동물과 사슴, 호랑이, 멧돼지, 사람의 형상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암각화를 보면서 잠깐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반구대 주변에는 암각화뿐 아니라 국보 제147호인 천전리 각석,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 암각화 박물관, 고려 말기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를 모신 반구서원 등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대곡박물관 전경(연합뉴스 자료사진)◇ 태화강 발원지를 찾아서3코스는 대곡박물관에서부터 유촌마을까지 7㎞로 3시간이 소요된다.시작점인 대곡박물관은 근처 대곡댐 건설 부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곳으로, 토기·철기·기와 유물과 조선시대 분청사기 등을 감상할 수 있다.대곡박물관을 지나 화랑운동장 인근 산 오솔길을 걸으면 울산 시민의 식수원이 되는 대곡댐을 볼 수 있는데, 댐 건설로 수몰돼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애환이 느껴지기도 한다.이어지는 4코스는 유촌마을에서 출발해 태화강의 수원지인 탑골샘까지 11㎞로 3시간 30분이 걸린다.탑골샘까지 가려면 약간의 등산을 해야 한다. 샘은 백운산 중턱인 해발 550m에 있다. 태화강 발원지인 백운산 탑골샘 << 울산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태화강 발원지'라고 적힌 바위가 나오는데 이 주변이 바로 태화강의 시작점인 탑골샘이다.이끼가 낀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물은 계곡을 따라 대곡천으로 흘러들어가 태화강으로 합류하게 된다.3코스와 4코스는 1·2코스와 비교해 볼거리가 다소 부족한 점이 흠이다. 이 때문에 제대로 복장을 갖춰 트레킹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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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박물관사업소 유물기증식 개최(수원=국민문화신문) 유한나 기자 = 수원시박물관사업소(소장 박래헌)는 17일 오후 2시 수원박물관 회의실에서 ‘2015년도 유물기증식’을 개최했다. 그동안 수원시박물관사업소는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며, 다양하고 수준 높은 유물에 대한 기증을 유도하고자 매년 기증식을 개최해 왔다. 수원시박물관사업소(수원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수원광교박물관)는 개관 전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유물을 기증받아 왔으며 기증유물 중 박유명초상(수원박물관)과 채제공 초상화(수원화성박물관)는 보물로 지정되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올 한 해도 수원박물관은 11명에게 1,661점, 수원화성박물관은 2명에게 184점, 수원광교박물관은 1명에게 1점을 기증받았다. 수원박물관은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무반인 해풍김씨 가문의 무관을 지낸 김수(金洙, 1680~1728)의 초상화와 역시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해주오씨 가문의 오득영이 착용했던 대한제국 군복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을 기증받았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조선후기 사용했던 조총과 정조시대 정승을 지낸 임한호(林漢浩, 1752~1827)의 교지 및 시권 등 고문서를 기증받았다. 또한 수원광교박물관은 고려시대 매병을 기증받아 광교지역 출토유물과 함께 상설전시하고 있다. 수원시박물관사업소 관계자는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은 앞으로도 유물 보존과 관리에 더욱 노력할 것이며, 정리된 기증유물은 상설·기획전시 및 연구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또한 내용별로 분류·정리한 후 기증유물목록집 등을 발간하여 관련 연구자와 기관에 배포하여 유물의 가치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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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문화·환경' 남북 3대 통로 열리나<<연합뉴스 TV 제공>>우리측 당국회담서 제기 전망…북측 호응 여부 주목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황철환 기자 = 11일 개성에서 열리는 제1차 남북 당국회담에서는 이산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 이외에도 민생·문화·환경이라는 '남북 3대 통로' 개척과 관련한 문제도 거론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른바 남북 3대 통로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8·15 경축사를 통해 처음 언급한 개념이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자는 '작은 통일론'을 바탕으로 민생·문화·환경 협력의 통로를 열어 서로 소통하고, 이를 통해 평화를 실현하자는 것이다.박 대통령은 지난 8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상임위원회 합동회의 축사에서도 '3대 통로' 개척을 위한 노력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식 <<연합뉴스 자료사진>>정부는 1년여간 3대 통로 개척을 위한 다양한 대북사업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번 회담에서 북측이 호응할지 관심이 쏠린다.대북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모자 패키지 사업과 민간단체의 대북지원 공모사업 등 주로 인도지원 관련 사업이 '민생의 통로'와 관련이 있다.이와 관련해 정부는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북한내 1만8천853개 영유아·산모 시설에 영양식을 보냈고,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니세프(UNICEF)의 마을진료소 시설·의료인력 교육·의약품 지원 사업을 후원하는 등 188억원 상당의 물자를 지원했다.8일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상임위원회 합동회 그러나 북측은 국제기구의 인도적 지원은 받으면서도 남측 민간단체의 지원은 꺼리는 경향을 보여왔다.남측 민간단체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대북 인도지원을 받기 시작했지만, 지난달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의 인도적 지원과 관련한 방북 일정을 갑작스레 연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화의 통로' 격인 사회문화교류 분야는 활성화되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올해 1∼10월간 방북 교류는 31차례로 지난해(21회)보다 48% 늘었다. 이중 상당수는 8·25 합의 이후 이뤄졌다.지난달 북한 개성 고려성균관에서 열린 개성 만월대 출토유물 남북공동 전시회'를 관람중인 국회 외통위 위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10월에만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 전시회(개성),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평양),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회의(금강산) 등 남북 공동행사가 잇따라 열리면서 남측 방북인원이 880여명에 달했다.농축산 및 산림·환경협력 등 '환경의 통로' 분야의 협력에서도 나름 원활한 성과를 보이는 양상이다.정부는 국제기구와 함께 함남·황북·강원 지역 온실·식수 개선 등 농촌개발 사업을 추진 중이며, 국내 민간단체 6곳의 온실·낙농 협력사업에도 14억3천만원을 지원했다.2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자료사진>>지난 10월에는 금강산 일대의 소나무가 고사(固死)하는 것과 관련해 1억3천만원 상당의 방제 장비와 약제를 지원했다. 고건 전 국무총리가 운영위원장으로 있는 민간단체인 아시아녹화기구는 지난달 북한 산림녹화 차원에서 묘목 2만3천 그루와 종자 4t을 북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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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700번 버스, 캠퍼스의 낭만과 역사가 깃든 여행천안 700번 버스 여행(천안=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천안 700번 버스는 대학 밀집 지역인 안서동을 출발해 천안종합터미널과 천안삼거리를 지난다. kjhpress@yna.co.kr (천안=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충남 천안은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중소 도시 중 대학이 많은 곳 중 하나다. 천안 700번 버스를 이용하면 대학이 밀집한 안서동, 번화가이자 호두과자 판매점이 즐비한 천안종합터미널 주변, 옛 삼남의 선비들이 과거시험 길에 거쳤던 천안삼거리를 지나는 알찬 여행을 즐길 수 있다.천안 700번 버스는 국내 최대의 대학 동네인 안서동을 출발해 천안의 중심지와 천안삼거리를 지나 세종시 전의면까지 운행한다. 경부선 천안역, 천안종합터미널과 천안고속터미널에 정차해 다른 지역에 사는 뚜벅이 여행자가 이용하기도 좋다. 그러나 꼭 700번 버스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701번, 710번, 720번, 730번 등 700번대 버스는 모두 주요 명소가 있는 안서동과 천안종합터미널, 천안삼거리를 지나기 때문이다. 물론 운행 횟수가 가장 많은 버스는 700번이다.◇젊은이들의 데이트 명소, 천호지 안서동에는 단국대 천안캠퍼스, 상명대 천안캠퍼스, 백석대, 백석문화대, 호서대 천안캠퍼스 등 대학교 5개가 모여 있다. 전국에서 하나의 동에 대학이 가장 많은 곳으로, 캠퍼스 투어를 즐기기에 제격이다.안서동 대학 타운 도보 여행은 ‘상명대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인근에 이 동네 최고의 명소인 천호지가 있기 때문이다. 천호지는 둘레에 2.3㎞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 인공 호수로, 군데군데 인공 섬이 자리하고 보행교와 길이 12m의 아치교도 놓여 있다. 또 체력단련장과 배드민턴장도 마련돼 있다. 호수 동안에는 커다란 창을 통해 낭만적인 풍경을 감상하며 향긋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들어서 있다. 바람 살랑거리는 봄날에 가족, 연인이 한가롭게 거닐며 시간을 보내기 좋다.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중 좋아하는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내용의 ‘꽃송이가’에는 ‘영화 보러 가자고 불러, 단대 호수 걷자고 꼬셔’라는 가사가 등장하는데 가사 속 ‘단대 호수’가 바로 천호지다. 천호지에는 짝사랑하는 사람과 산책로를 두 바퀴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많은 연인이 찾아와 걷곤 한다. 상명대 '식물과학관'과 백석대 '산사 현대시 100년관'(천안=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봄빛 싱그러운 상명대 천안캠퍼스의 '식물과학관'(위 사진)과 한국 현대시의 100년 역사를 엿보고 시를 감상할 수 있는 백석대의 '산사 현대시 100년관'. kjhpress@yna.co.kr ◇낭만과 문화가 있는 캠퍼스 나들이 천호지 동쪽의 도로를 건너 오르막길을 가다 보면 상명대 천안캠퍼스가 나온다. 캠퍼스는 아름다운 건축물, 인공 폭포와 하천, 천혜의 자연이 어우러져 캠퍼스의 낭만을 느끼며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상명대엔 식물원도 있다. 건물 이름은 ‘식물과학관’으로 식물식품공학과를 비롯한 식물 관련 학과의 교육 공간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난 2010년 조성됐다. 978㎡ 규모의 식물원에는 폭포와 연못, 도랑이 있고 온대, 양치, 관염, 분재, 허브 등 총 450여 종의 수목이 식재돼 있다. 방학 기간,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어문대학 앞에는 독도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 독도를 75분의 1로 축소한 것으로 국내 최초로 야외에 설치된 독도 조형물이다. 조형물 앞에는 독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조형물 맞은편 숲에는 버스커버스커의 장범준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소도 있다.상명대학교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는 백석대학교가 위치한다. 물론 걸어도 10분 정도면 닿는다. 이곳 창조관 13층에는 작가가 확인된 최초의 신체시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비롯해 최근의 작품까지 현대시 100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산사(山史) 현대시 100년관’이 있다. 고은 시인의 육필 병풍과 작품을 비롯해 현대의 희귀 시집, 원로와 중진 시인의 초상 시화, 주요 화가의 시화 등 시 문화재 1만6천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최근 천안 시티투어 코스에도 포함됐다. 아라리오 조각광장의 작품들(천안=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아라리오 조각광장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찬가'(맨 위 사진)를 비롯해 작품 3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kjhpress@yna.co.kr ◇번화한 도심의 거리에서 감상하는 미술 작품‘백석대학교’ 정류장에서 여섯 정거장을 이동해 ‘종합터미널’ 정류장에 내리면 천안의 번화가 중 하나인 ‘야우리’에 도착한다. 천안종합터미널과 고속터미널, 대형 백화점과 미술관, 영화관, 각종 상점과 식당, 술집이 밀집한 곳이다.특히 야우리시네마부터 신세계백화점 충청점을 지나 아라리오갤러리까지 약 300m의 거리에서는 다양한 미술 작품이 눈길을 끈다. 현재 아라리오 조각광장에는 데미안 허스트, 수보드 굽타, 고헤이 나와, 김인배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 3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곰 인형을 들고 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채러티’(Charity)와 인체 해부 모형을 거대하게 제작한 ‘찬가’(Hymn), 헌 놋그릇과 요리도구를 집적해 거대한 버섯구름을 형상화한 수보드 굽타의 ‘통제선’(Line of Control), 높이 13m에 무게가 26.5t에 달하는 고헤이 나와의 ‘매니폴드’(Manifold) 등 이색적인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1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한편 천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호두과자다.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동쪽으로 500m 떨어진 천안로사거리에는 호두과자 판매점이 모여 있고, 반대 방향으로 네 정거장 떨어진 천안역 앞에는 80년 역사의 ‘천안 원조 학화호두과자’ 본점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호두과자 제작 공정을 직접 볼 수 있고, 시식도 할 수 있다. 평화로운 천안삼거리 공원(천안=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방문객은 천안삼거리 공원을 한가롭게 거닐며 산책을 즐길 수 있다. kjhpress@yna.co.kr ◇고즈넉한 정취의 천안삼거리공원 천안역에서 아홉 정거장을 가면 ‘천안박물관’, 열 정거장을 이동하면 ‘원삼거리’ 정류소다. 천안박물관과 천안흥타령관, 천안삼거리공원이 모여 있는 곳으로 천안삼거리공원부터 들러보려면 ‘원삼거리’ 정류소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천안삼거리는 예부터 호남과 영남의 분기점이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도, 물건을 지고 가던 상인도 이곳에서 쉬어 가곤 했다. 지금도 천안삼거리에서는 국도 1호선과 21호선이 교차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옛 길손들이 머물렀을 듯한 주막 모형이 들어서 있다.천안삼거리공원은 방문객이 옛 천안삼거리를 엿볼 수 있게 조성한 고즈넉한 곳이다. 평온한 풍경의 산책로를 따라 가면 버드나무가 둘러선 연못과 ‘하숙생’ 노래비, 임금이 온양온천 행차 시 거처로 이용했던 화축관(華祝館)의 문인 영남루(永南樓) 등을 볼 수 있다.홀아비가 변방 수비를 위해 떠나며 천안삼거리의 주막에 맡겼던 딸인 능소가 훗날 아버지를 다시 만나 기뻐하며 불렀다는 ‘흥타령’ 전설을 떠올리며 거닐면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이란 노랫말이 절로 나온다.◇천안의 역사 기록된 천안박물관 천안박물관에서는 영남과 호남, 충청도의 문화와 사람이 교류하던 장소인 천안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고고실은 인면파수, 금제귀걸이 등 천안에서 출토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을, 역사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천안의 역사와 문화, 향촌사회의 생활상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봉선홍경가 갈기비(국보 7호),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국보 280호), 어사 박문수의 초상화와 홍패 교지 등도 볼 수 있다. 또 삼거리실에는 상점과 대장간, 주막 등 천안삼거리의 옛 모습이 재현돼 있고, 어사화를 꽂고 말을 탄 과거 급제자가 시가행진을 벌이는 모습이 모형으로 제작돼 있다.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등 구수한 천안의 옛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근대실에서는 유관순, 이동녕 등 천안 출신 애국지사들의 삶과 활동상을 볼 수 있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한편 천안박물관 맞은편에는 전통 술과 전통 춤 전문 박물관인 천안흥타령관이 있다. 이곳에는 누룩 틀, 소줏고리 등 전통주 관련 유물과 자료, 전국의 전통 명주,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술잔과 술병, 춤 관련 자료와 민속의상이 전시돼 있다. 천안박물관 입구(천안=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천안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천안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kjhpress@yna.co.kr ◇천안 700번 버스 운행 정보>>첫차와 막차 = 안서동 06:00, 21:40 / 전의면 읍내리 06:30, 22:30 >>운행 간격 = 10~40분(시간대별로 다름) >>기본 요금 = 현금 : 성인 1천400원, 청소년 1천120원, 어린이 700원 / 교통 카드 : 성인 1천350원, 청소년 1천70원, 어린이 650원>>문의 삼안여객 041-621-1994 dkl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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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도자기 역사를 잇는 마을이천시 사음동과 신둔면 일대는 이천을 대표하는 도예업체가 밀집한 도예촌이다. 이 곳은 도예장인들이 모여 맥이 끊긴 전통도자기 제조기법을 연구한 끝에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러한 예술적 혼을 이어가는 한국전통도예의 중심지로 우뚝 성장하게 되었다. 이천 3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큼지막한 사기막골 도예촌 간판을 볼 수 있다. 도예촌은 이천시 사음동 일대에 조성되어 있으며, 도예촌 전체에 걸쳐 크고 작은 도자기 상점들이 있으며 길 구석구석에 있는 도자기 가마도 볼 수 있다. 천년의 도자기 역사를 잇는 마을 16세기 초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천 지역 특산품으로 도자기가 소개됐다. 이천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기 조각들은 천년의 도자기 역사를 증명한다. ‘사기막골’, ‘점말’ 등의 지명도 이천 도자기 마을의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천 도자기 생산은 오히려 위축됐다. 경기도 광주에 왕실용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한 관요가 생기면서부터다. 이천 지역 도공들이 관요로 차출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천 도자기가 명성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가 지나서다. 해방 이후 신둔면 수광리 일대에는 두 곳의 칠기 가마가 남아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자기 문화재를 모으고 도예기술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계속됐지만 늘 재정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다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일본인의 한국 방문이 자유로워졌고, 전통 도자기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증가했다. 1970년대 이전 3개에 불과하던 가마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기점으로 100여 개로 늘어났다. 현재 이천 일대에는 300여개의 도예 공방이 있습니다. 이천 도자기의 유래 근래에 와서 이천 특산물을 이야기할 때에는 누구나 도자기를 첫 손가락에 꼽게 되는데, 그만큼 우리 이천이 도자기의 대표적인 산지로 이름나있고, 특히 300여개의 도자기 가마가 모여있는 신둔면 일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예촌으로 유명하다. 이와같이 이천이 도자기의 명산지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도자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흙이나 그것을 굽기 위한 땔나무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외적인 여건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전통 도자기를 재현해 낸 도공들의 장인정신 때문일 것이다. 이천 도자기는 16세기 초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 백옥과 함께 이 지역 특산품으로 기록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천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기편들도 이 지역 도자기의 역사가 훨씬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이천 지역에서 도자기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천시 사음동이나 마장면 해월리, 모가면 산내리 등지에서 가마터 흔적과 자편들이 출토되었으며, 이밖에 신둔면 수광리와 장동리, 모가면 소고리에도 요지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사기막골', '점말'등의 지명을 통해서도 이미 오래 전에 이 지역에 도자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전통 도자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은 현재진행형> 이천 사기막골 도예촌은 단순히 도자기 판매점의 집성촌이 아닙니다. 도예에 대한 애정으로 대를 이어가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자 작업장입니다. 해가 저물어 조용해진 동네 구석구석엔 힘찬 물레소리와 조각칼을 놀리는 재바른 손놀림이 마을을 다시 생기 있게 합니다. 이천도예촌 입구에 위치한 한 매장에서 만난 청년과의 인터뷰는 잔잔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시골같이 조용한 동네에 생각보다 젊으신 분이 계시니 의외네요. 여기서 일하시나요? - 예, 가족이 함께 일하는 작업장이자 운영하는 매장이구요. 저흰 아버지때부터 도예를 시작한 터라 제가 2대째가 되겠네요. (웃음) 그럼 상당한 수준이시겠네요? 도자기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 아뇨, 아직 한참 멀었죠. 도자기를 만드는 성형에서 그림에 조각까지. 그 어느 하나 손쉬운 건 없죠. 전 아직 초보라고 항상 생각합니다. 매일매일 작업하면서도 매번 공부하는 느낌이에요. 흙(소지)이 바뀔 때마다, 유약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불길을 달리 할 때마다 결과물은 다르거든요. 각각의 변수마다 기록을 남겨야 새로운 주제나 컨셉을 잡아야 할 때, 테스트를 적게 하면서 최적의 결과치를 내는 데 도움이 되죠. 도예가는 항상 공부하는 자세이어야 한다는 것이 도자기의 매력인 거 같아요. 새롭게 알아가는 것에 또 재미를 느끼구요. 도예 체험 공방도 운영하시나봐요? - 예, 영화 <사랑과 영혼>이나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도자기를 빚는 모습을 보시곤 많이들 해 보고 싶어하세요. 요새는 자녀들 현장학습 때문에도 많이들 방문하시구요. 전통 도자기도 작업하시봐요? - 전통하면 ‘고리타분하다, 뻔하다, 박물관에 있을 법한 거 아니냐’란 생각을 많이들 하세요. 하지만 그 뻔하다고 생각하는 청자도 1960년대가 돼서야 재현해 놓은 것이란 걸 아시는 분은 많지 않으실 거에요. 현재에 ‘익숙하다, 흔하다’라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죠. 삐삐를 떠올리시면 쉽게 이해가 가시겠죠? (웃음) 전통 도자기는 전승(傳承) 도자 분야로 분류되어 현재도 그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답니다. 한국도자관 :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544-23 경춘대로 295 / 031-634-5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