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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이 잘 있겠지?" 거짓 대화에 책가방까지 마련(종합)원영이의 즐거운 한때 [신원영군 가족 제공]'뻔뻔한' 계모ㆍ친부 치밀한 은폐 시도…14일 현장검증 (평택=연합뉴스) 최종호 기자 = 신원영(7)군을 학대 끝에 숨지게 한 계모와 친부가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처벌을 피하고자 갖은 범행 은폐 시도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 평택경찰서는 13일 전날 범행을 자백한 계모 김모(38)씨와 친부 신모(38)씨를 상대로 이날 새벽까지 조사를 이어갔다.김씨는 지난달 2일 원영군이 사망하자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신씨와 거짓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신씨는 원영군이 숨진 다음날 김씨에게 "원영이 잘 있지?"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김씨는 "밥 잘먹고 양치질도 했다"고 답했다.원영이 시신 옮기는 계모와 친부(평택=연합뉴스) 지난달 12일 밤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자택 현관 앞에서 원영이 친부 신모(38)씨와 계모 김모(38)씨가 시신을 차에 싣고 있는 CCTV 캡처 영상.2016.3.12[평택경찰서] goals@yna.co.kr지난 4일에는 회사에 "아들을 찾으러간다"며 휴가까지 냈고, 원영군을 찾으러 다니는 것처럼 김씨와 문자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다.원영군의 초등학교 입학을 준비한 것처럼 보이려고 초등학생용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구입하기도 했다.원영군을 강원도 지인에게 보냈다는 김씨의 거짓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차에서 김씨와 "원영이 잘 있겠지? 오줌 안싸는지 모르겠다. 이사가면 데리고 잘 살자"는 대화를 나눠 차량 블랙박스에 대화 내용이 녹음되도록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지난달 12일 원영군을 청북면 자신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한 야산에 암매장하고서는 이틀 뒤에 다시 찾아가 원영군이 묻힌 장소에 초콜릿을 놓는 이해 못 할 행동을 하기도 했다.계모에게 학대받다 숨진 신원영군 발인(평택=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13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평택장례문화원에서 엄수된 계모에게 학대받다 숨진 신원영군 발인에서 장례식장 관계자들이 운구를 하고 있다. 2016.3.13 xanadu@yna.co.kr이에 대해 신씨는 "밸런타인데이라서 원영이에게 초콜릿도 사주고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사죄하기 위해서 다시 찾아갔다"고 말했다.신씨는 또 원영군이 지난해 11월부터 자택 욕실에 감금되고 폭행당하는 등 김씨에 의해 학대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동학대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경찰은 14일 평택 자택과 야산 등에서 현장검증을 벌이고 김씨 등에 대해 살인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한 뒤 구속 만료 시한인 오는 16일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한편 원영군의 장례는 이날 오전 친모 등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택장례문화원에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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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리틀 싸이' 전민우 군, 뇌종양으로 숨져1년 반 동안 투병하다 9일 옌볜의 한 병원서 사망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던 '조선족 리틀 싸이' 전민우(12) 군이 지난 9일(현지시간)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자치주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현지 매체와 유족에 따르면 전 군은 8일 호흡곤란으로 지역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나빠져 9일 숨을 거뒀다.전 군은 2014년 8월 뇌종양의 일종인 뇌간신경교종 판정을 받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1년 반 가까이 투병해왔다.갑작스레 병마가 찾아오기 전 전 군은 '꼬마 가수'로 유명했다. 지린성 옌지(延吉) 출신인 전 군은 네 살 때부터 현지 방송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고, 2011년에는 SBS TV '스타킹'에서 '연변 동요'를 불러 국내 시청자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중국의 TV 예능 프로그램 '중국몽상쇼'에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불러 '리틀 싸이'로 인기를 모았다.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전 군은 뇌간신경교종 판정을 받고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왔다.당시 국내 방송을 통해 전 군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온정이 이어졌고, 가수 싸이도 전 군을 직접 공연장에 초청해 격려했다.하지만, 호전되던 전 군의 상태는 작년 5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두 달 뒤 중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이어갔지만 끝내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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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들 대학 갈 나인데…" 세월호 유가족 합동차례명절 음식 차리는 유가족(안산=연합뉴스) 강영훈 기자 = 세월호 참사 이후 맞이한 두 번째 설인 8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 내 합동분향소를 찾은 한 유가족이 집에서 준비해 온 명절 음식을 차리고 있다. 2016.2.8 kyh@yna.co.kr아이들 좋아하던 음식 차리고 '눈물'…설에 생일 맞은 희생자도 있어유가족, 단원고 앞에서 기자회견 열고 "416 교실 보존하라" (안산=연합뉴스) 강영훈 기자 =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설인 8일, 경기도 안산시 합동분향소에는 유족의 발걸음이 이어졌다.합동분향은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었지만 유족은 이보다 앞서 한손에는 국화꽃을, 또다른 손에는 정성스레 싸온 명절 음식을 들고 속속 분향소를 찾았다.영정 앞 제단에는 평소 아이들이 좋아하던 피자와 치킨, 백설기와 곶감 등이 올려졌다. 헌화가 시작되자 유족들은 설이면 아이들에게 먹였던 불고기와 잡채 등 갖가지 음식을 차리며 명절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아이들 없이 맞는 설이 여전히 익숙지 않은 듯 유가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한 유가족은 연방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고, 영정을 어루만지던 또다른 유족은 끝내 오열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설에 맞이한 생일(안산=연합뉴스) 강영훈 기자 = 세월호 참사 이후 맞이한 두 번째 설인 8일,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 내 합동분향소에 차례상이 마련됐다. 한 유가족이 생일케이크를 제단에 올려 놓고 생일을 맞은 아이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2016.2.8 kyh@yna.co.kr사고가 없었더라면 올해 대학에 입학할 아이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유족들의 아픔은 더했다.故 손찬우 학생의 어머니 김정희(58·여)씨는 "아이가 명절 때면 먹던 고기 반찬을 만들어 왔다. 아이가 맛있게 먹기를 바란다"며 "찬우 또래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 사고가 없었다면 우리 아이도 올해 대학에 갔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설에 생일을 맞은 故 김수진 학생의 영정 앞에는 생일 케이크가 함께 놓였다. 유가족들은 케이크에 초를 꽂고 갓 대학생 나이가 된 아이의 생일을 축하했다.김종기(52)씨는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케이크를 준비하고, 좋아하던 초콜릿과 치즈를 가지고 왔다"며 "설에 생일까지 겹쳐 마음이 더 아프다"고 울먹였다.유가족들은 아직 미해결 상태인 416교실(기억교실)의 존치 문제를 놓고 경기도 교육청과 단원고등학교를 비판했다.이들은 분향을 마친 뒤 오전 11시 30분께 안산 단원고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도교육청과 단원고는 부족한 교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고민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16교실 보존 요구하는 유가족들(안산=연합뉴스) 강영훈 기자 =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번째 설을 맞이한 8일, 4·16가족협의회가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앞에서 416교실 보존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읽고 있다. 2016.2.8 kyh@yna.co.kr 4·16가족협의회는 성명서에서 "현재 비교실 공간을 재배치하면 모자란 교실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며 "그런데도 단원고는 (부족한)8개 교실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대대적인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어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도록 단원고에서 새로운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며 "도교육청은 희생자와 재학생, 안산시민이 합의를 이룰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해야하고, 단원고는 그때까지 416교실의 보존을 약속해야 한다"고 덧붙였다.한편 유가족들은 개별적으로 단원고 기억교실 및 희생자가 안치된 안산 하늘공원, 평택 서호추모공원, 화성 효원납골공원 등을 방문한 뒤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한다.광화문 광장에서는 오후 4시 16분부터 세월호 가족과 시민들이 합동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나누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유가족은 개별적으로 추모의 시간을 가진 뒤 합동분향소에 모여 서울로 이동한다"며 "설 연휴 내내 시민과 함께 행사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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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 영결식> 김수한 전 국회의장, 추도사 전문< YS 영결식 > 눈 내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YS 영결식> 눈 내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 (서울 국회사진기자단=연합뉴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이 26일 오후 서울 국회 앞마당에서 거행되고 있다."진정한 문민정치가…모든 것 바치신 희생과 헌신의 삶""시련과 극복, 도전과 성취의 대한민국 민주헌정사 그 자체" (서울=연합뉴스) 이신영 기자 =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26일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민주주의와 민권을 위해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바치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김 전 의장은 이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이같이 평가한 뒤 "대통령님의 생애는 시련과 극복, 도전과 성취의 대한민국 민주헌정사 그 자체였다"고 강조했다.다음은 김 전 의장의 추도사 전문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영삼 대통령님. 지난 19일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불굴의 의지로 어려운 고비를 꼭 이겨내시고 반드시 회복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11월22일 0시20분 대통령님은 영영 저희 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 시절 대통령님께서는 국내에서의 투쟁을 접고 외국에 나가 있으라는 집요한 회유를 받으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핍박받는 국민들을 남겨두고 나혼자 편하자고 고난의 현장을 떠날 수는 없다며 단호히 이를 거부하셨습니다. 대통령님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을 섬겨 오신 진정한 문민정치가였습니다. 민주주의와 민권을 위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치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대통령님. 그렇게 사랑하던 조국 그렇게 사랑하던 국민 그렇게 사랑하던 동지들을 남겨 놓고 이렇게 홀연히 가셨습니까. 회고해 보면 실로 대통령님의 생애는 시련과 극복, 도전과 성취의 대한민국 민주헌정사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국가장은 국회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민의의 전당인 이곳 국회에는 대통령님의 숨결이 도처에 배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회를 포기하지 않았던 의회 존중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26세 최연소 의원으로 3대 국회에 처음 등원하신 이래 아홉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야당 원내총무 다섯번, 제1야당 총재 세번, 그리고 집권여당의 대표까지 지낸 의회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대통령님이었습니다.1970년에는 40대 기수론을 제창해 한국 야당사에 신기원을 열었고 1990년에는 3당 통합 결단으로 문민정부 탄생의 기반을 구축한 참으로 용기있는 지도자이셨습니다.자유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오시는 동안 초산테러 가택연금 국회의원직 제명 등의 혹독한 탄압이 간단없이 자행됐지만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기보다 잠시 죽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는 대통령님의 숭고한 의지를 꺽지 못했습니다. 특히 1983년 군부독재에 맞서 목숨 걸고 결행한 23일간의 단식투쟁은 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겨울공화국 치하에서 조국땅,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생명을 던져 처절하게 저항하는 대통령님의 모습은 모든 민주세력들에게 무한한 감동과 용기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절규는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들의 가슴속에 민주주의에 대한 비원으로 아로새겨져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993년 2월25일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군사조직 척결, 공직자 재산등록제, 금융실명제,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 등 경이적인 민주개혁을 과감히 단행하셨습니다. 군사독재체제의 누적된 폐해를 혁파하고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공고히 한 역사적 결단이었습니다. < YS 영결식 > 영결식장 들어오는 운구차<YS 영결식> 영결식장 들어오는 운구차 (서울 국회사진기자단=연합뉴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운구차량이 26일 오후 서울 국회 앞마당에서 거행된 국가장 영결식장에 들어오고 있다.그리고 이는 거짓과 위계, 음해와 사술을 배격하고 한결같이 '대도무문(大道無門 )'의 정도를 걸어온 김영삼 대통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퇴임 후에도 대통령님께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나라의 근본을 흔들려는 불순한 기도가 감지될 때마다 가해진 준엄하고 단호한 경고는 강력한 제동력을 발휘해 국가사회가 혼돈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여론에 좌고우면함 없이 "옳은 길이라면 백만인이 반대해도 꿋꿋이 나의 길을 간다"는 불퇴전의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대의 앞에 단호한 대통령님이셨지만 이웃들에게는, 동지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지난 5일간 언론을 통해 그간 숨겨졌던 대통령님에 관한 일화들이 많이 소개됐습니다. 소탈하고 가식없었던 대통령님의 따뜻한 면모를 새삼 추억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이 모처럼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울대병원 빈소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분향소에는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광주 '5·18 기념재단'이 5.18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고 명예회복, 민주묘지 조성, 국가기념일 지정을 하신 대통령님을 기리기 위해 대통령님 유족들에게 공로패를 드리기로 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통합과 화합이라는 휘호를 유언처럼 남기신 정직한 언행일치의 삶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랑하는 대통령님 .지난 닷새의 장례기간 빈소를 지키면서 금방이라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조문객사이에 끼어 앉아 격의없는 대화를 함께 나누시는 대통령님의 모습을 부질없이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 저 건너편에서 '나 김영삼인데요'하는 대통령님의 음성이 바로 들릴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머지않아 저희 모두 대통령님의 부재를 실감하게 되겠지만 사람을 중히 여겼던 대통령님을 모시고 정치역정을 함께 해온 많은 후배동지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세우고 님께서 염원하셨던 상생과 통합, 화해와 통일의 그날을 반드시 실현해낼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끝으로 이땅에서 대통령님과 영결하는 이시간 저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온국민의 이름으로 삼가 대통령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영삼 대통령님 참으로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사모하던 하나님의 품안에서 부디 안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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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 귀국당일 YS 빈소 조문…孫여사 손잡고 애도(종합2보)< YS 서거 > 헌화하는 박 대통령<YS 서거> 헌화하는 박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7분간 빈소 머물며 김현철씨 등 유족에 위로 뜻 전해金 "찾아주셔서 감사"…朴대통령 "장지를 잘…" 예우갖춘 장례 뜻 밝혀취임 이후 5번째로 직접 빈소 찾아 조문 (서울=연합뉴스) 정윤섭 이광빈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은 23일 오후 현대 정치사의 '거산(巨山)'이었던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직접 애도의 뜻을 밝혔다.박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7박10일간의 다자회의 순방 일정을 마치고 이날 오전 6시10분께 서울공항에 도착했으며, 귀국 이후 약 8시간 만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검은색 바지 정장 차림의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께 이병기 비서실장, 박흥렬 경호실장, 현기환 정무수석, 정연국 대변인과 함께 서울대 병원에 도착, 7분간 머물렀다. 박 대통령은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김 전 대통령 영정 앞에서 분향 및 헌화를 했고, 잠시 묵념을 하면서 고인의 넋을 기렸다. < YS 서거 > 조문하는 박 대통령<YS 서거> 조문하는 박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이어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며 위로의 뜻을 전했고, 다른 유족들을 향해선 고개를 숙여 애도의 뜻을 표했다. 김씨는 박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고, 박 대통령은 "(국립서울현충원) 장지를 잘 이렇게…"라고 언급하면서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박 대통령은 빈소 내 가족실로 이동해선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났다. 거동이 불편한 손 여사는 의자에 앉아 박 대통령을 맞이했고, 박 대통령은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손 여사의 손을 감싸 잡으며 깊은 애도와 추모의 뜻을 밝혔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YS 서거 > 유족 위로하는 박 대통령<YS 서거> 유족 위로하는 박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나서 차남 현철씨 등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박 대통령이 조문할 당시 빈소에는 상도동계 핵심인사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김덕룡 전 의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등이 있었고, 박 대통령은 이들과도 차례로 악수했다.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22일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가 열렸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보고받은 뒤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이에 따라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의결했으며,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키로 했다.박 대통령은 26일 영결식에도 참석할 전망이다.한편,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직접 조문을 한 것은 이번이 5번째다.앞서 박 대통령은 고(故) 남덕우 전 총리(2013년 5월),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언니인 고(故) 박영옥 여사(2015년 2월)가 별세하자 빈소를 직접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또한, 작년 4월 경기도 안산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바 있으며, 올해 3월에는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국장(國葬)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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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유족·행자부 실무 합의(종합)빈소에 놓인 YS영정(서울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故 김영삼 전 대통령 영정이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놓여 있다. 2015.11.22 zjin@yna.co.kr장지는 현충원…정오 임시국무회의서 공식 논의 (서울=연합뉴스) 박성민 하채림 기자 =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거행하고 장지는 현충원에 두기로 유족 측과 행정자치부가 합의했다.정부는 22일 정오 정부서울청사에서 김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를 공식 결정할 예정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유족 측과 합의된 내용이 임시국무회의에서 최종 결정된다"면서 "임시국무회의에서는 국가장 진행, 장례위원회 구성, 장지, 영결식과 안장식 등 장례 절차 전반을 심의한다"고 설명했다. 국가장 절차는 정부와 유족의 협의 후 행정자치부 장관이 제청하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결정한다.빈소 향하는 김현철씨(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가 빈소로 향하고 있다. 2015.11.22 seephoto@yna.co.kr국가장이 결정되면 정부는 장례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례 기간에 조기를 단다.장례위는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거나 위촉하는 위원장 1명과, 위원장이 임명 또는 위촉하는 6명 이내의 부위원장, 필요한 수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유족에게는 위원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장례위 밑에는 집행위원회도 설치된다.국가장 장례위원장은 국무총리로 예상되며, 집행위원장은 법령에 따라 행자부 장관이 맡는다. 장례위원장은 국가장 집행을 자문하기 위해 사회 각 분야의 대표자들을 고문으로 위촉할 수도 있다. 장례위는 국가장의 방법·일시·장소, 묘지 선정 및 안장, 영구(靈柩)의 안치·보전, 예산 편성·결산 등 장례의 대부분 사항을 관장한다. 빈소의 설치·운영, 운구 및 영결식, 안장식은 정부가 주관하며, 지자체와 재외공관의 장은 분향소를 설치·운영할 수 있다.국가장의 장례 기간은 천재지변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을 때 국무회의를 통해 연장이 가능하지만 5일 이내로 하기로 정해져 있다. 국가장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조문객 식사비나 노제·삼우제·49일재 비용, 국립묘지 외의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국가장의 내용을 규정한 국가장법은 기존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 것이다. 국장(國葬)과 국민장(國民葬)의 성격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자 정부가 둘을 국가장이라는 명칭으로 통일시키면서 법 이름도 변경했다. 이처럼 국가장으로 통일되기 전에 서거한 역대 대통령들의 장례식은 국장과 국민장, 가족장 등 다양한 형태로 치러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국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부와 유족의 협의에 따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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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편지와 함께 잠든 신해철…"남편이 매순간 보고싶다"(종합)1주기 추모식에 유족·동료·팬 500여명 참석…유해, 야외 안치단에 봉안 (안성=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To 아빠, 아빠 사랑해요~♥ 뭐하고 계세요?'가수 고(故) 신해철의 딸 지유(9) 양과 아들 동원(7)군이 아빠에게 쓴 편지 봉투에는 천진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25일 경기도 안성시 유토피아추모관에서 열린 신해철 1주기 추모식에서 납골당에 있던 고인의 유해가 야외 안치단(추모 조형물)으로 옮겨져 영면했다.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안치단에는 두 자녀의 편지를 비롯해 고인의 분당 작업실을 재현한 모형물, '내일은 늦으리' 카세트테이프, 고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 상패가 함께 담겼다. 높이 2m, 너비 1.7m 크기의 오면체 모양으로 된 안치단은 딸이 그린 그림과 '빛이 나는 눈동자가 있어서, 우리를 보고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두 자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설계됐다. 여기에는 넥스트의 대표곡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Here I stand for you)의 가사가 새겨졌다. 유해가 옮겨지고 두 자녀는 고사리 손으로 흰 국화를 헌화했다. 1년 전 고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추모곡으로 널리 불린 '민물 장어의 꿈'을 넥스트의 트윈 보컬 이현섭이 선창하고 동료와 팬들이 합창했다. 이날 오후 1시30분 추모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팬클럽 '철기군' 등 가슴에 보라색 리본을 단 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부산에서 온 한 여성 팬(38)은 "신해철 씨가 생전 좋아하는 색이 검은색, 빨간색, 보라색"이라며 "고인이 평소 검은색, 빨간색 의상을 많이 입어 세 번째로 좋아하는 보라색 리본을 달았다"고 말했다. 추모식은 송천오 신부가 집전한 미사로 시작됐다. 맨 앞자리에는 고인의 부인 윤원희 씨와 두 자녀, 부모, 누나가 자리했다. 두 자녀는 의젓한 표정으로 찬송가를 불렀고, 부인은 간간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유족뿐 아니라 이현섭, 김세황, 정기송 등 전·현 넥스트 멤버 10여 명과 '절친' 남궁연, '히든 싱어'의 신해철 편에 출연한 모창자들, 팬들까지 500여 명이 자리해 여전히 믿기지 않는 고인의 부재를 가슴 아파했다. 팬들은 영정사진에 마지막 메시지를 적어내려 가며 가시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마치 고인의 위로처럼 유토피아추모관 평화의광장에는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가 크게 울려퍼졌다. 추모사 낭독에선 동료와 팬이 고인의 음악적인 업적에 감사하고, 독설가가 아닌 따뜻한 형이자 아버지였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리워했다. 이현섭은 "신해철 님의 발자취는 한국 대중음악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을 것"이라며 "우리는 형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한다. 사랑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겠노라"고 말했다.교복을 입고 낭독을 한 고교 3학년 팬 이승우 군은 신해철의 실물을 본 적도 공연을 간 적도 없다며 "우연히 넥스트의 '세계의 문'으로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줬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줬다. 그는 떠났지만 우리는 그 뜻을 잊지 않겠다"고 울먹이다가 눈물을 흘렸다. 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가수 싸이, 이재명 성남시장 등이 조화를 보내 추모했다. 부인 윤원희 씨는 행사가 끝난 뒤 취재진에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며 "힘든 와중에도 천사 같은 아이들이 제 손을 잡아줬고 온 국민의 애도와 격려를 받았다. 어린 아이들이 세상에서 날개도 펴지 못하게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족끼리 더 힘을 모으게 된 것 같다"고 지난 1년의 심정을 밝혔다. 이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며 "아빠가 같이 입학식도 가고 손도 잡고 입장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같은 시간대 잠든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누울 때마다 빈자리가 크다. 밤에 자다가 몰래 울기도 한다. 매일 매 순간 보고 싶다"고 남편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나타냈다. 또 "직장을 다니면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며 "제가 직장을 나가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두 아이를 챙겨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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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누적 체납액 7조2천억…1년새 3천억 늘어지역가입자 체납률 40% 육박…노령연금 평균 수급액 34만4천850원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 국민연금 보험료의 누적 체납액이 7조2천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만에 3천억원 이상 늘었다. 15일 국민연금공단이 발표한 '국민연금 공표통계(2015년 6월말 기준)'에 따르면 6월까지 국민연금 누적 체납액은 7조1천831억원에 달했다. 이는 작년 6월의 6조8천705억원에 비해 1년 사이 3천126억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누적 체납액은 국민연금 제도 시행 이후 쌓인 체납액을 뜻한다. 6월 한달간 체납액만 해도 3천2억원을 기록해 부과액 중 체납된 액수의 비중을 뜻하는 체납률은 9.9%나 됐다. 체납된 국민연금 보험료는 사업장 가입자보다는 지역 가입자에게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업장 가입자의 체납률은 5.6%였으나 지역 가입자 체납률은 38.4%나 됐다. 지역가입자가 납부해야 할 보험료 중 5분의 2를 체납한 것이다. 사업장 가입자의 경우 누계 체납률은 0.06% 수준으로 낮은 편이지만 지역가입자의 경우 누계 체납률도 10.2%이나 돼 시간이 지나도 체납액이 납부되지 않고 있다. 지역 가입자의 체납률이 높은 데에는 정부가 직장 가입자에 대해 저소득층 지원 사업을 벌이지만 지역 가입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원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 것이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정부는 현재 10인 미만 사업장 소속 월 근로소득 140만원 미만 근로자에 대해 서는 국민연금과 고용보험료의 50%를 지원하는 두루누리 사회보험 지원사업을 시행 중이다.한편 6월말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2천137만781명으로 1년 전에 비해 36만5천662명 늘었다. 이 중 58.6%인 1천251만2천988명은 사업장 가입자였으며 39.5%인 843만2천463명은 지역 가입자였다. 임의가입자와 임의계속 가입자는 각각 22만4천150명과 20만1천180명으로, 1년 사이 3만4천303명, 5만6천406명이나 증가했다. 임의가입자는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자는 아니지만 노후를 위해 자발적으로 국민연금에 가입해 연금보험료를 내는 가입자다. 임의계속가입자는 연금수급 개시 연령이 지나 보험료 납부 의무가 없어졌으나 가입기간을 늘리기 위해 계속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다.국민연금 중 장애연금이나 유족연금을 제외하고 노령연금만을 가지고 따졌을 때 월 평균 수급액은 34만4천850원이었다. 맞춤형 기초생활보장제도의 1인가구 기준 생계급여의 최저보장수준(중위소득의 28%)인 43만76천원에도 8만5천원 가량 못미치는 수준이다. 여기에는 제도 도입 초기 5~9년만 가입해도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한 특례연금이 포함됐는데, 특례연금을 제외하면 평균 수급액은 48만4천520원이 된다. 연금을 수급한 사람 중 가장 많은 액수를 수령한 경우 지급액은 182만6650원이었다. 20년 이상 국민연금을 납부한 사람의 평균 수령액은 88만4천620원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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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만의 귀향> 87년 만에 만난 할아버지는 한 줌 재였다홋카이도서 이틀간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115위 모두 인수 (비바이·삿포로<일본 홋카이도>=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할아버지, 오랜 시간 너무 죄송했습니다."13일 오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비바이(美唄)시 토메이(東明)의 절 조코지(常光寺)에서는 한 남성의 한 서린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이하 귀향추진위) 한국 측 대표 단체인 ㈔평화디딤돌이 비바이 미쓰비시 탄광에서 사망한 조선인 유골 6위(位)를 인수하는 자리였다. 이 울음소리의 주인 손영진(65)씨는 작고한 어머니 이영순(1908년 출생)씨의 사진이 든 액자와 작은 외할아버지 안태복(1906년 출생)씨의 유골함을 안고 있었다.손씨의 외가는 일제강점기에 집안의 기둥 두 개를 동시에 잃었다. 외할머니가 손씨의 어머니를 잉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8년 1월, 외할아버지 안태산(1900년 출생)씨와 태복씨 형제는 서울 집에서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갑자기 강제로 끌려갔다. 형제의 소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손씨는 "외할머니가 외로우실 때는 혼자 많이 우시는 걸 봤는데 어렸을 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며 울먹였다. 그는 1980년대부터 백방으로 외할아버지 형제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결국 손씨의 외할머니는 남편과 시동생을 다시 만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5년 98세로 눈을 감았다. <70년만의 귀향> 할아버지 오랜시간 죄송했습니다 (비바이<일본 홋카이도>=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13일 오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비바이(美唄)시 토메이(東明)의 절 조코지(常光寺)에서 열린 비바이 탄광에서 희생된 조선인 강제 노동 희생자 추도식에서 손영진(오른쪽)씨가 작은 외할아버지의 유골이 담긴 함을 전달받은 뒤 오열하고 있다. 손씨의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강제로 비바이 탄광에 끌려가 현지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손씨의 외할아버지의 유골은 아직 실종상태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이하 귀향추진위) 한국 측 대표 단체인 ㈔평화디딤돌이 일본 기업인 미쓰비시 탄광에서 사망한 조선인 유골 6위를 이날 인수했다. 2015.9.14 hkmpooh@yna.co.kr손씨가 외할아버지 형제의 소식을 들은 것은 작년이었다. 비바이 미쓰비시 탄광 갱 내 가스 폭발 사고로 숨진 노동자를 모시는 일본의 한 절 명부에 작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결국 손씨의 작은 외할아버지는 이날 영문도 모른 채 일본으로 끌려간 지 87년 만에 한 좀 재가 돼 외손자 품에 안겼다. 외할아버지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미쓰비시 탄광 깊은 곳에서 실종됐다고 추정만 할 뿐이다. "얼마나 남편을 기다렸으면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티시다가 돌아가셨겠습니까. 이제야 작은 외할아버지를 뵈니까 가슴이 찢어지고 연민의 정을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손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화디딤돌은 이날 오후에는 삿포로(札晃)시로 이동해 절 혼간지(本願寺) 별원에 모셔진 71위의 유골을 찾았다. 이 유골들은 홋카이도의 한 건설업자가 따로 보관하다가 1997년에 혼간지에 맡긴 것이다. 이옥순(88·여)씨도 이날 1942년 끌려간 시동생 김일중(1925년 출생)씨의 유골을 손에 넣었지만 이 유골은 온전치 않았다. 일본 기업들과 혼간지가 김씨를 비롯한 조선인과 중국인의 유골 101위를 항아리 세 개에 나눠 모두 섞어버린 것이다. 이씨는 2004년 아들 김경수(65)씨와 함께 혼간지에 와서 유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다른 이들의 유골과 뒤섞여 있다는 이유로 가져올 수가 없었다.결국, 긴 협의 끝에 11년 만인 이날 유골을 무작위로 71명분으로 나눠 고향으로 데려가게 됐다. 허리가 굽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혼간지를 찾은 이씨는 고령인 탓에 말을 잇기가 쉽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강한 분노로 울렸다. "시동생을 살아서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돼 기가 막히고 목이 메. 밤마다 잠이 안 왔어. 유골을 이렇게 섞어버렸으니…." 아들 김씨는 "결과적으로 유골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 것과 섞여 유족 입장에서는 관련 기업이나 혼간지 별원이 사과를 했으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에 대해 혼간지 별원 관계자는 "봉환을 위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만 말할 뿐, 유골이 섞인 데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평화디딤돌은 이날 조코지 6위, 혼간지 별원 71위를 되찾으면서 홋카이도 전역에 있는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115위를 모두 회수했다.이들은 전날에는 홋카이도 아사지노(淺茅野) 비행장과 우류(雨龍)댐 희생자 유골 38위를 인수한 바 있다. 혼간지 별원 추도식에 참석한 주삿포로 한국총영사관 한혜진 총영사는 "홋카이도에는 유골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희생자의 유해가 아직 산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 행사가 일부 민간단체의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일 양국 정부와 관련 기업 등이 함께 나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홋카이도 당국자들은 서면 메시지를 보내 유골 봉환 행사의 의의를 기렸다.다카하시 하루미(高橋はるみ) 홋카이도 지사는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대했을 희생자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을 이국에서 잃은 유족의 마음을 생각하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번 활동으로 홋카이도뿐 아니라 양국의 구호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아키모토 가쓰히로(秋元克廣) 삿포로 시장은 "조국 땅에서 평안하게 잠드실 수 있도록 마음으로부터 위령의 말씀을 올린다"고 말했다. 이후 유골 115위는 배편으로 한 많은 땅인 홋카이도를 뒤로하고 도쿄(東京)로 모셔졌다. 귀환단은 육로로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유골을 옮기며 추모 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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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찾아달라 112신고 했는데…1시간 만에 주검으로"(종합)유족, 동해서 경찰관 6명 인권 유린 의혹 제기…검찰에 진정 (동해=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집을 뛰쳐나간 아들을 찾아달라고 112 신고했을 뿐인데, 1시간도 안 되어 아들은 경찰의 제압 과정에서 주검이 돼 돌아왔습니다."강원 동해에서 맨발로 집을 뛰쳐나간 40대가 경찰의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잃고 쓰려져 숨진 사건과 관련, 해당 유족들이 인권 유린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지난 7월 12일 숨진 사모(41) 씨의 유족들은 3일 검찰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말다툼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찾아달라고 112 신고한 것뿐인데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아들을 주검으로 병원에서 만났다"고 주장했다. 이어 "동해경찰서 지구대 경찰관 6명은 무자비하게 제압한 아들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번갈아 짓눌렀다"며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가 절박했는데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은 채 제압에만 급급했고, 119구급대가 6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음에도 채워진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또 "아들은 경찰에 제압당한 현장에서 사망했는데도 경찰은 병원에 이송 후 사망했다고 거짓 변명하고 있다"며 "경찰은 인권유린 사실을 은폐하고자 평소 약을 복용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아들을 정신질환자로 부각시켰다"고 토로했다.유족들은 "사건 현장에서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등 모든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설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도로를 뛰어다니는 정신질환자라면 경찰이 인권 유린으로 죽게 해도 되는지 묻고 싶다"라고 반문했다.유족들은 "경찰은 아들에게 수갑을 왜 채웠고 (제압 후에) 왜 풀어주지 않았는지, 국과수 부검을 사전에 왜 알리지 않았는지 등을 숨김없이 공개하라"라며 "사건 현장 검증을 하고, 주변의 블랙박스 동영상 원본을 공개하는 등 인권 유린·조작 의혹을 철저히 밝혀달라"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 당시 현장 출동한 경찰은 "도로로 뛰쳐나간 사씨를 뒤쫓아가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엎드리게 한 뒤 수갑을 채웠는데도 계속해서 발길질하며 저항했다"라며 "엎드려 있던 사씨의 움직임이 없어 살펴보니 상태가 이상해 119에 신고했다"라고 진술했다. 특히 경찰은 "사씨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수갑 열쇠가 사라져 예비 열쇠로 사씨의 수갑을 풀었다"며 "이는 예비 열쇠를 가지러 간 사이에 도착한 119구급대가 수갑을 풀어달라고 요청한 지 불과 15초 만이었고, 이때만 해도 사씨의 맥박이 뛰고 있어 병원으로 이송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사씨의 부검결과 평소 지병인 우울증 등의 치료를 위해 장기 복용하던 '신경안정제의 혈중농도가 치사 농도에 이르렀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소견이 나왔다"며 "이 사실을 사씨의 부모에게 설명하려 했으나 '정신이 없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해 간략히 부검의 소견을 설명해 줬다"라고 덧붙였다.한편 사씨는 지난 7월 12일 오후 5시 16분께 동해시 부곡동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집을 뛰쳐나갔고, 사씨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달라'라고 112에 신고했다.이후 사씨는 '도로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는 남자가 있다'라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6명에 의해 제압됐으나, 이 과정에서 오후 6시 19분께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