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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특집Ⅰ> 알고봅시다 ②수영지난 2010년 11월 14일 중국 광저우 아오티 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200미터 자유형 결승에서 마린보이 박태환이(3번레인)이 힘찬 스타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경영·다이빙·수구·싱크로에 대회 최다 53개 금메달 (서울=연합뉴스) 배진남 기자 = 육상과 더불어 양대 기초 종목으로 꼽히는 수영은 크게 경영, 다이빙,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이하 싱크로), 수구 등 4개 종목으로 나뉜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경영 38개(남녀 19개씩)를 비롯해 다이빙 10개(남녀 5개씩), 수구 2개(남녀 1개씩), 싱크로 3개(여자) 등 무려 53개의 금메달이 수영에 걸려 있다. 총 439개의 금메달이 나오는 이번 대회 36개 종목 중 금메달이 가장 많다. 2006년 도하 대회 때는 금메달이 51개였다가 4년 전 광저우 대회부터 여자 수구와 싱크로 팀 콤비네이션 두 종목이 추가돼 메달도 늘었다. 수영이 '메달밭'이라고는 하나 그동안 중국과 일본이 양분한 아시안게임 수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 선수는 8명뿐이다. 한국수영은 고(故) 조오련 씨를 비롯해 최윤희 등 걸출한 스타의 힘으로 근근이 금맥을 이어갔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1970년 테헤란 대회와 1974년 방콕 대회에서 남자 자유형 400m와 1,500m 금메달을 잇달아 목에 건데 이어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는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가 여자 배영 100m와 200m, 개인혼영 200m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최윤희는 1986년 서울 대회에서도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1990년 베이징 대회와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지상준이 남자 배영 200m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방승훈도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이후 1998년 방콕 대회에서 조희연이 여자 접영 200m 금메달, 2002년 부산 대회에서 김민석이 남자 자유형 50m 금메달을 목에 걸어 '노골드'의 수모는 피해갔다. 그러다가 한국수영은 2006년 도하 대회에서 박태환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앞세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경기고 2학년생이었던 박태환은 자유형 200m·400m·1,500m에서 3관왕을 차지하고 단체전까지 뛰며 혼자 7개의 메달(금 3, 은 1, 동 3)을 수확했다. 한국수영은 도하에서 경영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1개를 수확하며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침체에서 벗어났다. 박태환은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도 자유형 100m·200m·400m에서 우승해 2회 연속 3관왕의 위업을 이루고 은메달과 동메달 두 개씩을 보탰다. 또 정다래가 여자 평영 2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목에 걸어 한국수영 단일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기록을 세웠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특히 세계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의 초강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2006년 도하에서 경영에 걸린 38개의 금메달 중 16개씩을 일본과 나눠 가진 중국은 광저우 대회에서는 24개(일본 9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았다. 중국과 일본이 가져가지 못한 나머지 5개의 금메달 중 네 개를 한국이 거둬들였고 싱가포르가 하나를 건졌다. 한국은 인천 아시안게임에 58명(남자 32명, 여자 26명)의 국가대표가 출전한다. 경영이 남자 16명, 여자 19명 등 35명으로 가장 많고 수구 13명, 다이빙 8명(남자 3, 여자 5명), 싱크로 2명 순이다. 이번에도 한국수영이 믿는 구석은 박태환(인천시청)이다. 박태환은 자유형 100m·200m·400m·1,500m와 단체전인 계영 400m·800m, 혼계영 400m 등 총 7개 종목 국가대표로 뽑혀 메달 사냥에 나선다. 남녀 자유형 50m의 양정두(인천시청)와 이재영(강원도청), 남녀 접영의 윤석환(서귀포시청)과 안세현(울산시청) 등도 메달을 노리는 후보다. 안종택 경영대표팀 감독은 "변수가 많은 종목인데다 중국, 일본 선수들과 기록 차가 크지 않아 제 기록만 내준다면 좋은 성적을 기대할 만하다"고 전망했다. 광저우 대회와 달리 대표를 별도로 뽑은 남녀 단체전에서도 동메달 이상에 도전한다. 다이빙은 도하 대회에 이어 광저우 대회에서도 금메달 10개를 모두 싹쓸이한 중국에 맞설 만한 적수가 이번에도 없어 보인다. 광저우 대회에서 동메달 하나를 딴 한국 다이빙은 김영남(인천체고)-우하람(부산체고)이 짝을 이룰 남자 싱크로 다이빙에서 은메달까지 바라보고 있다. 싱크로에서는 구슬-김가영(이상 한국체대)이 듀엣 부문에 출전하지만 메달 획득은 쉽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6년 서울 대회에서 은메달, 1990년 베이징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것이 역대 아시안게임 메달의 전부인 수구도 다시 한번 홈 이점을 안고 메달에 도전한다. 저변이 넓지 않은 탓에 여자부에는 지난 대회에 이어 참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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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수 "과거 신민아 매니저였다…조인성 등 연기 가르쳐"SBS '힐링캠프' 18일 출연…"24년간 공황장애 앓아"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배우 류승수(43)가 과거 신민아(30)의 매니저로 일했던 사실, 24년간 공황장애를 앓은 사실 등을 방송에서 고백했다. SBS TV '힐링캠프'는 류승수가 18일 밤 11시15분 방송에서 이같은 개인사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고 밝혔다. 제작진에 따르면 류승수는 앞서 진행된 녹화에서 "배우가 되기 전 신민아의 매니저를 했었다"며 "신민아의 어머님이 나를 참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고향인 부산에서 장혁과 함께 연기학원을 다녔던 경험, 이후 연기학원을 차려 지금은 톱스타가 된 조인성과 이요원을 비롯해 박한별, 송지효 등을 제자로 가르쳤던 일도 들려줬다. 이와 함께 류승수는 불우했던 가정사와 비행청소년 시절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류승수는 "어머니가 안 계셨고 너무 가난했다.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지내 겨울이면 잘 때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며 "그 때문에 학창시절 방황했고 결국 가출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빚쟁이들의 행패로 아버지가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방황을 접게 됐다"고 밝혔다. 류승수는 지난 24년간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그는 "스무 살 때 갑자기 찾아온 심장병으로 쓰러졌고 그후 일주일에 한 번씩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때 그 공포로 인해 공황장애가 왔다"며 "내 인생에서 정말 힘든 시기였다.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드라마 '겨울연가'로 일본에 한류 붐이 불어 출연진이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때도 공황장애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해 일본을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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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여고생 살해 암매장…잔혹한 범행수법 '경악'>토사물 먹이고, 끓는 물 붓고…시신 얼굴 훼손까지 (창원=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지난 5월 경찰에 구속된 경남 김해 여고생 살해 사건의 피의자인 또래 여중생들의 잔혹한 범행수법이 재판과정에서 알려져 주변을 경악하게 하고 있다. 이들은 숨진 여고생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몸에 끓는 물을 붓는 것은 물론 휘발유를 이용해 시신을 훼손하고 나서 암매장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창원지방검찰청은 지난 5월 여고 1학년 윤모(15)양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을 훼손한 혐의(살인·사체유기 등)로 양모(15), 허모(15), 정모(15)양 등 여중생 3명과 윤양을 유인해 성매매를 시키고 시신 유기를 방조한 김모(24)씨를 구속기소했다. 이들과 공모한 이모(25), 허모(24)씨, 또 다른 양모(15)양 등 4명은 대전지방검찰청에서 구속기소했다. 재판에 넘겨진 이들에 대한 1심이 진행되면서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을 통해 이들의 충격적인 범죄행각이 드러났다. 4일 창원지검에 따르면 공소장에는 여중생 3명과 범행에 가담한 이씨 등의 잔혹한 범행이 담겨 있다. 이들은 지난 3월15일께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윤양이 김씨를 따라 가출하자 부산의 한 여관에서 함께 지내며 성매매를 강요해 받은 화대로 생활을 이어갔다. 윤양 아버지가 가출신고를 한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3월29일 윤양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성매매 강요 사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다음날 윤양을 울산의 한 모텔로 다시 데려갔다. 이들은 윤양에게 다시 성매매를 시키다가 4월4일 모텔 내 컴퓨터를 이용, 페이스북에 접속한 윤양을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했다는 이유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씨 등 남성들은 윤양과 여학생들을 번갈아가며 1대 1 싸움을 시키고 구경하거나 윤양을 집단적으로 폭행했다. 냉면 그릇에 소주 2병을 부어 마시도록 하고 나서 윤양이 구토하면 토사물을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윤양이 '너무 맞아 답답하니 물을 뿌려달라'고 부탁하자 윤양의 팔에 수차례 끓는 물을 붓기도 했다. 윤양 몸 곳곳에 상처가 났는데도 '앉았다 일어서기' 벌을 100회씩 시켰고 윤양이 집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때렸다. 그러다 4월10일 윤양은 대구 한 모텔에 주차된 승용차 뒷좌석 바닥에 웅크려 급성 심장정지로 숨졌다. 이들은 숨진 윤양의 시신을 유기하기로 하고 다음날 경남 창녕군 대지면의 한 야산으로 갔다. 남성들은 윤양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시신 얼굴에 뿌리고 불을 붙여 그을리게 하고 나서 시멘트를 반죽해 시신 위에 뿌리고 돌멩이와 흙으로 덮어 암매장했다. 윤양을 암매장한 남성들은 대전에서 양양에게 성매매를 시키려다가 성매수 남성이 양양이 '꽃뱀'이라고 의심하자 해당 남성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 창원구치소와 대전구치소에 각각 수감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경찰은 집에서 나간 딸이 연락되질 않는다는 윤양 부모의 신고를 받고 수사를 시작, 지난 5월2일 이들을 붙잡았다. 잔혹한 범행수법에 충격을 받은 피해자 윤양의 가족은 생업도 포기한 채 창원과 대전을 오가며 피고인들의 처벌을 호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원지검 김영대 차장검사는 "범행수법이 잔혹해 이들에 대해 법정최고형을 구형하는 등 엄벌에 처할 방침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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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있어요' 부른 70년대 스타 이현 "40년만에 노래해요"'잘 있어요'를 부른 1970년대 스타 이현 원조 꽃미남 가수이자 장군의 아들…KBS '콘서트 7080'으로 은퇴 후 첫 방송 나들이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지난 23일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의 한 카페에 장년의 한 남성이 들어섰다. 첫 만남이었지만 1970년대 LP 재킷에서 본 '꽃미남' 청년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젊은 날의 인상이 오롯했다. 바로 1970년대 '귀공자 가수'로 불린 이현(64)이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 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잘 있어요') 그는 1970년 박춘석이 작곡한 '내 사랑 지금 어디'로 데뷔해 '잘 있어요'와 '춤추는 첫사랑'(번안곡), '똑같애', '잊지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수많은 소녀 팬들을 울렸던 TV 스타다. 한 블로그에선 그에 대해 '요즘 말로 완소남'(완전 소중한 남자)이었다고 했다. 그는 남다른 집안 출신으로도 화제였다. 외할아버지는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고(故) 이응준 씨, 아버지는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초대 합참의장·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1960년대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등 각국 대사를 역임한 고(故) 이형근 씨다. 당시에도 '사생팬'(사생활을 쫓는 팬)을 몰고 다닌 이현은 1975년 12월 '언약'과 '누구일까'가 담긴 독집 앨범을 끝으로 1976년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후 방송과 언론에 단 한 차례도 모습을 비추지 않아 근황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잊히던 그가 약 40년 만에 가수로 돌아와 마이크를 잡았다. 앨범과 공연으로 거창한 컴백을 한 건 아니지만 방송 출연이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오는 27일 방송하는 KBS 1TV '콘서트 7080' 녹화를 마친 그를 만났다. 언론 인터뷰도 은퇴 후 처음이다. "여러 차례 방송 제의가 왔는데 자신이 없었어요. 이번 출연을 결정하고도 후회했죠. 매일 악몽을 꿨어요. 하하." 그가 용기를 낸 데는 팬들의 힘이 컸다. 2012년 5월 '추억의 70년대 ♡ 가수 이현 팬카페'가 생겼고 흩어져 있던 중장년 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사업하는 팬카페 지기 박상진(57) 씨가 중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날 인터뷰 자리에도 박씨가 참석했다. 이현은 "처음엔 팬카페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며 "'대체 몇 명이냐'고 물었더니 5명이라더라. '그럼 오케이, 동호회 식으로 소통해보자'고 답했다. 상진 씨가 내 앨범 자료를 정리하고 내 노래에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려주며 정말 열심이었다. 지금은 회원 수가 347명이다. 지난 40년간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고맙고 미안하더라. 이번 방송 출연은 팬들에 대한 답례"라고 말했다. ◇ 가수·배우·광고 모델로 전방위 활동…"사생팬 따라다닌 TV 스타" 가수 데뷔를 한 건 사실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영국에서 1년간 생활하다가 귀국한 그는 외교관 자녀 특례입학이 없던 시절, 예비고사 원년과 맞닥뜨렸다. 외국 생활 끝에 예비고사를 봐야 했고 성적에 맞춰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69학번으로 입학했다. 과 이름도 생소했지만 연극, 영화를 하리라곤 꿈에도 몰랐기에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다. 당시 과 선배로 현역 가수인 배성, 펄시스터즈의 배인순이 있었다. 이들처럼 앨범을 내거나 연기를 하면 학과 실기 점수에 반영돼 그는 앨범을 내기로 했다. 이현은 "아버지 지인의 소개로 지구레코드를 찾아갔다"며 "그곳에서 박춘석 선생을 소개받았고 노래를 들어보시더니 앨범을 내주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낙하산' 데뷔였다"고 웃었다. 그러나 데뷔 앨범부터 바로 반응이 왔다. 이어 '이별이 주고 간 슬픔', '춤추는 첫사랑'이 히트하자 오아시스레코드에 스카우트됐고 '잊지마', '잘 있어요' 등을 내며 승승장구했다. 신인상과 'MBC 10대 가수상'을 잇달아 받으며 6년간 11장의 앨범을 냈다. 특히 '잘 있어요'는 야구장에서 상대팀을 약 올리는 응원가로 쓰이며 오랜 시간 널리 불렸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아름다운 청춘'을 데뷔작으로 '별난 장군', '영광의 탈출', '청춘 교사', '아빠와 함께 춤을' 등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당시 동아제약이 첫선을 보인 음료수 '오란씨'의 광고 모델로도 2년간 활동했다. 당시 파트너는 배우 윤여정, 김미영이었다. 이현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당시 한 신문 기사에선 '팬들이 이현의 머리카락을 뜯어가고 옷을 찢어갔다', '지방 공연 차 묵은 숙소의 신발과 옷을 가져갔다'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현은 "그땐 지방을 돌며 극장식 공연을 많이 했다"며 "한번은 부산에서 대구로 이동했는데 내가 묵은 여관에 부산의 여고생 팬들이 따라와 방을 잡았더라. 그 방 가서 야단을 치고 내 차를 태워 보냈던 기억이 난다"고 웃었다. 중학교 때부터 팬이었다는 팬카페 지기 박씨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신바람 나는 '증언'을 했다. "살아있는 인형이었죠. 하하. '쇼쇼쇼', '명랑오락회', '가요스팟' 등 오빠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들었죠. 팬카페에도 초등학교 4학년 때 필이 꽂혔다는 팬, 이대 후문 쪽 오빠 집을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 과자를 주셨다는 팬, 첫사랑이라는 팬 등 정말 추억담이 많아요."(박상진) 1970년대 발표한 앨범 재킷/팬카페 제공 1970년대 발표한 앨범 재킷/ 팬카페 제공 ◇ 인기 절정에서 아버지 반대로 은퇴…"40년간 사업에 전념, 돌아보니 후회" 그러나 이현은 인기의 절정에서 은퇴했다. 가수 생활은 대학 때까지만 하라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신인상을 타고 세배를 갔을 때 뒤로 돌아앉아 울고 계셨다"고 한다. 그는 "반항심에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앨범을 스스로 소각했다"며 "내가 법관이 되길 바라셨던 아버지는 내내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그때 더 버틸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2002년 작고했는데 병환으로 오래 누워계셨어요. 그때 저한테 '넌 가수를 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말을 하시더군요. 그 말씀에 정말 약이 올랐어요."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당시 함께 활동한 남진, 나훈아, 배호, 이상렬 등 가요계 동료와도 연을 끊었다. 그는 1979년 강남역 뉴욕제과 뒤에 디스코텍 '스튜디오 80'을 오픈했다. 복싱 챔피언이자 친구인 홍수환이 이태원에서 스포츠 댄스 클럽을 하는 걸 보고 300평 규모로 꽤 크게 운영했다. 고(故) 이주일 등이 무대에 섰고 손님을 밀어낼 정도로 번창했다. 그러나 이것도 1년 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음악감상실을 한다고 거짓을 고했던 터라 이 사실을 안 아버지의 반대에 다시 부딪혔다. 이후 그는 "인테리어를 하다가 건축일을 했고 통신회사(기산통신)를 운영하는 등 쉬지 않고 사업을 했다"며 "현재 한국코아엔지니어링 회장으로 있다"고 말했다. "노래 맛을 알아갈 즈음 관두면서 미련이 남아 일종의 반항심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업을 한 거죠. 그런데 얼굴이 알려진 게 사업에는 지장이 되더군요. 사람들이 뒤돌아서면 '쟤가 '잘 있어요' 부른 사람'이라고 수군댔죠. 녹록지 않았어요." 그는 비로소 다시 노래할 수 있다는 게 더없는 기쁨이지만 거창한 '컴백'이 아니라 다시 음악 안에서 살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올해 김추자 씨가 33년 만에 컴백했다는데 대단한 용기이고 결단"이라며 "김추자 씨처럼 앨범 내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건 어렵겠지만 팬들과 소통하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노래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팬카페 지기 박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팬카페에 엄마 따라온 20대 팬도 있고, 남성팬도 2~3할은 돼요. 출발은 미약하지만 오빠를 통해 토막 토막의 추억을 공유하니 즐거운 소풍 갔을 때 느낌이 들어요."(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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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 60년> 완행열차, 느릿한 철도에 옛 추억1967년 서울 북가좌역을 통과하는 경의선 열차. (연합뉴스DB)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해방됐을 무렵 우리 국토에는 이미 많은 철로가 개설돼 있었다. 경인선을 비롯해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장항선, 전라선, 경춘선, 중앙선이 운영됐다. 사통팔달 연결된 철도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1946년 경부선에 특별 급행열차인 ‘조선해방자(朝鮮解放者)호’가 도입되면서 열차의 차별화 시대가 열렸다. 조선해방자호는 전망, 우등, 일등으로 구성된 열차로 이등칸과 삼등칸이 없었다. 일반 운임에 급행료가 붙어서 가격이 비쌌다. 열차는 주로 운송수단으로 인식됐지만, 관광 용도로도 쓰였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0년대에는 서울에서 경주와 대천으로 향하는 관광열차가 인기를 끌었다. 1955년 피서객을 겨냥해 선보인 대천행 열차는 오전 6시 40분 서울을 출발해 정오 무렵에 도착했다. 오늘날 용산에서 대천까지 무궁화호가 2시간 40분 정도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느린 편이었다. 이외에도 여름이면 대구와 포항을 오가는 열차, 부산에서 송정리를 왕복하는 열차 등이 운행됐다. 해운대 동쪽에 위치한 송정리역에서는 송정해수욕장이 지척이었다. 경춘선이 출발하는 기점이었던 서울 성동역. (연합뉴스DB) 초창기에 우리나라의 철로를 누비던 열차는 증기기관차였다. 증기기관으로 동력을 얻어 달리는 이 기차는 1927년부터 1945년까지 국내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군이 사용하던 수송용 디젤기관차를 인수한 뒤에는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1967년 8월 31일 증기기관차의 마지막 운행을 알리는 종운식(終運式)이 열렸다. 이날 '파시형' 증기기관차는 남원에서 서울까지 운행한 뒤 퇴역했다. 하지만 증기기관차는 독특한 모양새와 소리 때문에 이후에도 어린이날 행사 등에 이용됐다. 디젤기관차의 출현은 속도전의 시작이었다. 신속하고 쾌적한 열차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1969년 2월 경부선에 나타난 '초특급' 열차인 '관광호'가 신호탄이었다. 442㎞ 거리를 평균 시속 78㎞로 달리는 관광호는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다. 관광호는 경부선의 또 다른 열차인 '재건호', '비둘기호', '맹호호', '통일호'보다 1시간 이상 빨랐다. 그러나 턱없이 비싼 운임과 운행 2개월 만에 발생한 사고 때문에 탑승객이 많지는 않았다. 그때 서울에서는 여수, 목포, 강릉으로도 특급열차가 다녔는데, 서울과 강릉을 잇는 '십자성호'는 11시간이나 걸리는 '완행' 특급이었다. 경인선 열차의 1969년 모습. (연합뉴스DB) 열차 여행객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증가했다. 비용이 저렴하고, 비교적 안전하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1972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비행기와 고속버스의 탑승료는 각각 4천200원, 1천950원이었다. 그러나 관광호는 2천690원, 특급열차는 1천570원, 완행열차는 810원이었다. 특히 완행열차는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모든 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싼 찻삯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중앙선이나 경춘선 완행열차는 풍광이 수려한 명소를 통과해 여행자들이 애용했다. 1980년대에는 선로를 늘리는 복선화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됐고, 여객 철도 체계도 정비됐다. '관광호'를 개명한 '새마을호'를 필두로 우등열차는 '무궁화호', 특급열차는 '통일호', 완행열차는 '비둘기호'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수익성이 좋지 않은 완행열차에 대한 폐지와 푸대접으로 이어졌다. 1989년에는 부산과 광주를 연결하는 경전선을 비롯해 경북선과 영동선의 비둘기호 운행이 중단됐다. 1998년에는 천안-대전, 대구-마산, 포항-부산, 동대구-부산 등에서 기적을 울리던 비둘기호 열차 89개가 자취를 감췄다. 지난 10여 년간은 철도 환경이 급변한 시기였다. 증산역에서 구절리역까지 45.9㎞ 구간을 달리던 정선선 비둘기호가 2000년 11월 14일 마지막 운행을 마쳤다. 이로써 비둘기호는 역사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정선 증산역과 구절리역을 오가던 비둘기호 열차. (연합뉴스DB) 반면 2004년 4월에는 12년간의 공사를 통해 완공된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돼 최고 시속 300㎞의 고속열차인 KTX가 투입됐다. KTX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40분 만에 주파했다. 비둘기호에 이어 통일호도 뒤안길로 물러났지만, 완행열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30년 전 우등열차였던 무궁화호가 완행열차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무궁화호를 타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 30분이 걸리지만, 가장 먼저 매진될 만큼 인기가 높다. 또 경전선과 장항선, 영동선 등에서 운행되는 무궁화호도 열차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광주에서 전남 화순으로 향하는 경전선 무궁화호 열차. (연합뉴스DB) 이제 완행열차는 '관광열차'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중부내륙 순환열차(O-트레인), 백두대간 협곡열차(V-트레인), 남도해양 열차(S-트레인) 등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열차 여행 상품이다. 간이역마다 정차하지는 않지만, 예스러운 정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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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행렬' 일본 연고도시 행사 내달 막올라>'조선통신사의 옛 길을 따라' (연합뉴스 자료사진) (부산=연합뉴스) 이종민 기자 = 조선통신사 행렬의 일본 연고도시 행사가 내달 3일 쓰시마를 시작으로 오는 11월 9일까지 4개 도시에서 펼쳐진다. 부산문화재단은 8월 3일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 참가를 시작으로 같은 달 23∼24일 시모노세키 '바칸 마쓰리', 10월 후쿠오카 '아시아 태평양 페스티벌', 11월 카와고 '부활! 다문화 공생 국제교류 퍼레이드' 등 조선통신사 연고 도시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를 연다고 19일 밝혔다. 본 행사에 앞서 오는 21일부터 29일까지 나고야, 시즈오카, 하코네, 도쿄 등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일본 연고지 유적지, 시설을 방문하는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행사를 진행한다. 올해 처음 열리는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행사에는 일반 시민 참가자, 조선통신사 소식지 편집위원, 국제문화교류사업 자문위원 등이 참가한다. 부산문화재단은 지난해 불상 도난 문제로 행사 참가가 취소됐던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에는 예년보다 더 많은 인원을 보내 대규모의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할 계획이다. 시모노세키 '바칸 마츠리'에서는 부산지역 예술단을 파견하고 행렬 재현 행사와 함께 홍보부스도 운영한다. 시모노세키 행렬 재현에는 공모를 통해 일반시민 30명을 참여시킬 예정이다. 특히 시모노세키 행사에서는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를 위한 제1차 한·일 학술위원회가 예정돼 있어 양국의 의견을 나누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매년 5월 열리는 조선통신사 국내 행사는 세월호 참사로 취소됐다. 박승환 부산문화재단 팀장은 "올해 처음 시도되는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흔적을 따라 그 역사적 의의와 정신을 배우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국내 행사는 세월호 사고로 취소됐지만 하반기에 펼쳐지는 일본 연고도시 행사는 참가 인원을 늘리는 등 규모 있게 치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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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습지 무료개방)울산시, 올해도 회야댐 생태습지 한 달간 무료 개방“연꽃도 보고 연잎 차도 마시고”울산시, 올해도 회야댐 생태습지 한 달간 무료 개방8월 14일까지 인터넷, 전화 등 사전 예약 … 1일 100명 한정 탐방울산의 주 식수원인 회야댐 상류에 조성된 ‘생태습지 탐방장’ 이 지난 2012년 전국 최초 개방한 데 이어 올해 3년째 울산시민에게 개방된다.회야댐 생태습지는 자연친화적인 방법인 수생식물의 정화기능을 통해 BOD(생물학적산소요구량) 최대 59.1%, COD(화학적 산소요구량) 18.6%, 총질소(T-N) 18.6%, 총인(T-P) 66.7%까지 제거하는 놀라운 수질정화 효과를 거두고 있다.또, 생태습지에는 약 5만㎡의 연꽃과 12만 3,000㎡ 부들․갈대 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기도 하며, 사진 촬영 명소로도 손색이 없다. 이에 따라 울산시 상수도사업본부(본부장 이종환)는 수생식물 성장과 연꽃 개화 시기 등에 맞춰 오는 7월 21일부터 8월 22일까지 여름 한 달간 ‘회야댐 생태습지 탐방장’으로 시민에게 개방하여 탐방기회를 제공한다고 밝혔다.다만, 상수원 보호구역 내 자연 및 수질보호를 위해 탐방 인원은 1일 100명 이하, 견학 시간은 오전, 오후 등으로 구분, 제한 운영한다.생태탐방은 생태 해설사의 알기 쉬운 설명과 함께 울주군 웅촌면 통천 초소에서 생태습지까지 왕복 4.6km 구간을 도보로 이동하면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수림이 우거진 독특한 자연환경과 옛 통천마을의 변모된 모습, 수질정화를 위해 조성된 생태습지와 지난해와 달리 창포, 어리연 등 다양한 수생식물 40여 종 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탐방학습장 등을 2시간여 둘러본다. 또, 탐방객을 위해 생태습지에서 재배해 가공한 연잎차, 건연근 무료 제공을 비롯하여 연잎 차 시음회, 연잎 따기 등 다양한 이벤트 행사도 마련된다.벌써 탐방객의 입소문으로 단체, 시민 등 견학 문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탐방구간이 상수원보호구역이고, 시민의 식수를 만드는 곳인 만큼 하루 100명 이내로 오전, 오후 두 번만 개방하고 안전을 고려해 초등학교 4학년 이상 학생과 일반 시민 등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는다.신청은 상수도사업본부 누리집(홈페이지)(water.ulsan.go.kr) 탐방코너 또는 전화(229-6430~4)로 오는 8월 14일까지 사전 예약하면 된다. 참가비는 무료이다.상수도사업본부 관계자는 “회야댐은 식수원 보호가 최우선인 곳이지만, 울산 수돗물에 대한 믿음과 생태환경도시 울산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올해에도 무료로 개방하기로 했다. 상수원 보호라는 본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견학 인원과 운영 기간 등에 제한이 불가피했다.”라며 생태탐방 시 시민의 많은 이해와 협조를 당부했다. 한편, 지난해 전국 최초로 상수원 보호구역인 회야댐을 개방하여 울산지역 시민, 단체는 물론 인근 포항, 양산, 부산 등 다른 지역에서도 견학하는 등 총 6,000여 명의 탐방객이 다녀갔다. 자료제공/울산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