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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숭실대, 그 역사를 담아내다숭실대학교. (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올해 개교 124주년을 맞이하는 숭실대학교(총장 장범식)는 189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많은 역사와 아픔이 담겨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숭실대학교는 ‘진리와 봉사’를 건학이념으로, ‘통일시대의 창의적 리더’를 인재상으로 하여 혁신을 이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의 역사는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의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숭실 학당에서 시작된다. 숭실 학당은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참된 교사와 교역자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 아래 중등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숭실 학당은 1900년 가을 신학기부터 수업연한 5년의 중학과정인 숭실학교로 발전하여 1904년 5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숭실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민족의 독립에 이바지할 젊은 인재를 양성했다. 대다수졸업생들이 교역자·교육자로 활약했으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졸업생도 상당수가 있다. 최초의 근대대학 숭실대학교는 1906년에 4년제 대학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과정의 교육을 실시했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했으며, 교명은 ‘Union Christian College’, ‘평양예수교 대학’ 또는 ‘평양숭실대학’이라고 했다. 숭실대학은 미장로교 선교부가 주체가 되어 세워졌지만, 선교사들과 한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민을 위한 ‘기독교정신’과 평양주민들의 교육구국을 위한 ‘민족정신’이 결합되어 설립된 기독교 대학이었으며 근대민족대학이었다. 숭실대학은 근대학문체계를 최초로 도입하여 교육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학교육의 효시가 됐다. 숭실대학 교육. 숭실대학 교과서. 숭실대학 초기 교과는 성경, 수학, 물리학, 자연과학, 역사학, 인문과학, 어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개설됐다. 초기 교재는 주로 미국에서 사용하던 교과서를 번역, 재편집하여 인쇄했다. 숭실대학에서 운영하던 기계창에서 등사하여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한글 활자를 구비한 일본 요코하마[橫濱]의 복음출판사에 보내어 인쇄했다. 이후 대학 내에 출판부를 설치하고 교과서를 비롯하여 기독교 서적 및 각종 학술서적을 간행했다.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항했다. 이는 숭실대학이 기독교 정신 함양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는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지교육 강요로 인하여 1925년 전문학교로 개편됐다. 그러나 전문학교로 개편된 이후에도 대강당, 기숙사, 본관의 신축 및 증축을 통하여 교육 시설을 완비하고, 농과를 설치하여 농촌지도자를 배출하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최고 교육을 통해 숭실이 배출한 인재들은 교역자, 교사, 음악인, 학자 등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상당수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제강점기 숭실대학의 학생들은 전도활동을 비롯하여 음악, 체육, 문예 등 다양한 방면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한국민에게 희망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전도 활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근대음악의 도입에 초석을 닦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체육활동에서도 축구를 비롯하여 각종 종목에서 한국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문예활동에서도 한국의 훌륭한 문인들을 다수 배출했다. 근대적 문물수용에 앞섰고, 항일의식이 강했던 평양에서 출범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적 자존과 양심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한말 외교권 박탈에 항거하여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며, 많은 졸업생들이 신민회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주도했고, 평양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학생운동에 앞장섰다. 폐교관련 보도자료. 평양숭실 캠퍼스모형(1930년대). 또한,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숭실대학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1938년 3월 자진 폐교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민족혼을 지킴으로써 ‘기독교 대학’이자 ‘민족대학’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행동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숭실 동문들은 평양에 숭실대학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공산정권 수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5월 10일 서울 영락교회의 부속 건물을 임시교사로 하여 재건했다. 1957년에는 현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서울 숭실로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됐다. 1960년대 숭실대학 모형. 1967년에는 김형남 학장이 취임하면서 지난날 신문화와 과학문명 도입에 앞장섰던 전통을 되살려 공학부를 설치하고 국내 대학 최초로 전산교육을 실시했다. 1971년에는 대전대학교와 통합, 종합대학으로서의 체제를 갖췄고, 1983년에는 대전캠퍼스와 분리하여 유서 깊은 옛 이름 ‘숭실대학교’로 교명이 환원됐다. 현재 숭실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두고 지식 정보화 교육을 선도하는 등 첨단 교육환경을 배경으로 21세기를 선도하는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코로나 19 상황 이전부터 비대면 교육을 준비해온 숭실대는 지난 2018년 NHN와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클라우드 기반의 스마트 캠퍼스를 선도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 MOU’를 체결했다. 올해 3월 서버 안정화를 위해 기존 서버를 클라우드로 이관을 마쳤으며, 교수 대상 원격교육 역량강화 지원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지속될 비대면 수업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건물마다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강의실 6개 실을 확충하고 문제 해결 중심의 자기주도형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 인게이지드 러닝(Engaged learning) 강의실을 구축했다. 아울러 비대면 강의를 위한 신규 1인 스튜디오의 꾸준한 증설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숭실역사실. 숭실대학교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숭실대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숭실대학교 부속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찾아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에는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 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과 로마 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역사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기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한국의 역사와 배경,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배우고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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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 역사와 문화를 한 공간에 담다숭실대학교 한국 기독교 박물관. (서울=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숭실대학교 부속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 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과 로마 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층 한국기독교역사실과 2층 숭실역사실, 3층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 고고미술실 등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시민과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한국기독교문화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 교수의 일생에 걸친 열정과 그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고(故)김양선 교수가 미군정청으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아 1948년 4월 20일 서울 남산에 있는 옛 조선신궁 터에 ‘기독교박물관’과 ‘매산고고미술관’을 개관·운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하여 많은 자료가 분실되고 박물관 자리가 국회의사당 부지로 결정됨에 따라 1958년 2월 28일 폐관됐었지만, 그 후 김양선 선생의 민족문화와 기독교 문화 창달을 위한 숭고한 뜻에 의해, 1967년 10월 10일 숭실 개교 70주년을 맞아 숭실대학교 부속 박물관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실. 박물관 1층 한국기독교역사실은 한국기독교 역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경교 관련 유물들을 비롯하여 초기 천주교 교리서와 신앙서적, 박해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여 천주교의 수용과 자생적 천주교회 설립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개신교의 수용과정과 선교사 활동, 기독교의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는 한글 성경을 비롯한 다량의 자료가 전시되어있어 개신교의 발전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기독교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경교로부터 시작한다. 경교는 기독교의 한 종류로 페르시아 지방에서 7~8세기 중국에 전래 되어 유행했던 기독교의 일파이다. 당시 당과 밀접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던 통일신라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돌십자가. 전시실을 들어가자마자 바로 만나볼 수 있는 유물은 ‘경교 돌십자가’이다.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십자가 형태의 석물로, 8~9세기 무렵 경교가 우리나라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다. 한글 성경. 찬송가. 한국개신교는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국 선교사가 비기독교국가인 한국 땅에 공식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하여 읽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기독교가 외국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속에 형성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의 개신교 유입은 1832년 내한한 독일 출신인 선교사 귀츨라프와 1866년 이 땅에서 첫 순교자가 된 영국 선교사 토마스의 선교 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외국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여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켰고, 성경 번역과 문서선교를 통하여 신앙 확산에 노력하였다. 전도문서 출간. 조선성교서회는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및 정기간행물과 잡지류를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된 이래 1890년 ‘성교촬리’를 시작으로 ‘훈진언(1891년)’,‘쟝원량우샹론(1892년)’ 등 전도교리문서를 출간했다.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을 비롯한 초기 문서선교 사업은 기독교와 일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선교체제가 정착되어 가면서 점차 한글 성경 보급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7년 서울지역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누가복음전’을, 1892년 ‘마태복음전’을 발간했다. 그 후 성서 번역사업은 급진전되어 1900년 마침내 ‘신약전서’ 출판하게 된다. 번역위원으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레이놀즈, 게일, 스크랜톤, 최병헌 등이 활약하였다. 광범위하게 보급된 한글 번역 성경은 기독교계의 한글 교육과 계몽운동을 촉진하였고 한글의 민중문자화에 공헌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통치방식을 전환하면서 외견상 문화활동의 폭은 넓어졌다. 기독교계 역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문화 활동이 기독교 신문 잡지의 발간과 교육사업이다. 그리스도신문. 기독교 관련 서적의 발간으로 서구 신한과 문화를 국내에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적 기독교문화 창출에 기여하였다. 1897년 2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죠선크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였고,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가가 ‘그리스도신문’을 주간으로 창간했다. 1915년에는 양교파 연합으로 기독교 주간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였다.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도 한국교회는 기독교 문서운동, 주일학교 운동, 농촌운동 들을 통해 민족사회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30년대 들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함에 따라 기독교계는 크게 동요하게 된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교회와 교인들은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자발적 수용과 전파라는 역사적 경험 위에서 한국개신교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최대 교단이던 장로교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여 한국교회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조직은 정규 신학교육 및 주일학교 운동 등의 발전으로 더욱 그 토대가 강화되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송만영 관장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앞으로 각종 학술활동 및 사회교육활동 등을 통해 한국의 문화유산과 기독교 문화를 보다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한국기독교문화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기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전반적인 기독교역사와 배경,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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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最古 학교 체육관 '이화여대 토마스홀', 문화재 된다'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등 3건은 문화재 등록 이화여자대학교 토마스홀.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체육시설인 '이화여자대학교 토마스홀'을 비롯해 건물 5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15일 밝혔다.이화여대 토마스홀은 지하 1층, 지하 2층 석조건물로, 감리교 부인선교부의 한국 사업간사였던 토머스 여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35년 세워졌다.건축 당시에는 체육관으로 이용됐으나, 1963년 체육대학에 무용과가 생긴 뒤부터는 무용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모습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학교 시설로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문화재청 제공] 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1880년대 건립된 한옥인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과 1950∼1960년대 건설된 '제주 대정여자고등학교 실습실(구 98육군병원)', '군산 둔율동 성당', '천주교 광주대교구청 브레디관'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은 19세기 후반 전북 지역에서 현감을 지낸 조병무가 처음 지었다. 이후 조병무의 아들인 조강환이 아들들을 위해 옆에 한옥 두 채를 더 건설해 세 가옥이 하나의 영역을 이뤘다.이 가운데 한옥 한 채는 소실됐고, 나머지 두 채가 남아 있다. 조병무가 처음 세운 집은 후대에 병원으로 이용됐고, 곳간은 개조돼 여인숙으로 쓰이기도 했다.제주 대정여고 실습실은 1951년 제주도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되면서 이듬해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건설된 병원 건물로, 1964년 대정여고가 개교하면서 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다. 군산 둔율동 성당. [문화재청 제공]군산 둔율동 성당은 1955년 세워진 군산 최초의 성당으로 설계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성전신축기'(聖殿新築記)에 남아 있다.1961년 대건신학교 기숙사로 건립된 천주교 광주대교구청 브레디관은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건물 모습이 '신'의 초성인 'ㅅ' 자다. 중앙부에 공동화장실, 세면실, 휴게실이 있고, 옥상에는 건물의 실내온도를 낮춰주는 수조가 설치돼 있다.한편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등록 예고했던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 1908년 간행된 '찬송가'를 문화재로 등록했다.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문화재청 제공]해병대는 진해, 부산에서 임시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다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1959년 250㎡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교회로 활용했다. 이 건물은 19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방치됐고, 2003년 보수공사를 거쳐 다시 교회로 이용되고 있다.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는 높이가 8.6m에 이르는 커다란 그림으로, 상단과 기단 부분은 1927∼1928년에 제작됐고 하단은 1938년에 만들어졌다. 디자인의 완성도가 높고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찬송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파 연합 찬송가로 악보 없이 가사만 수록된 점이 특징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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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세운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문화재 된다'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등 4건은 문화재 등록 문화재청은 1959년 서울 용산구에 건립된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15일 밝혔다.해병대는 진해, 부산에서 임시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다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250㎡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지었다. 이 교회는 19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됐으나 2003년 보수공사를 거쳐 교회로서의 기능을 회복했다.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는 해병대 기독교 신앙의 근거지로서 군종사(軍宗史)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문화재청 제공]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와 1908년 간행된 '찬송가'(Union Hymnal)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는 높이가 8.6m에 이르는 커다란 그림으로, 상단과 기단 부분은 1927∼1928년에 제작됐고 하단은 1938년에 만들어졌다. 디자인의 완성도가 높고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 [문화재청 제공]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찬송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파 연합 찬송가로 악보 없이 가사만 수록된 점이 특징이다.한편 문화재청은 지난 10월 등록 예고했던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신약 마가전 복음서언해', '구약전서', '예수성교전서' 등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개신교 서적 4건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는 1882년 3월 24일 출간된 최초의 한글 성경이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존 로스 선교사와 이응찬·백홍준 등이 번역에 참여했고, 중국 선양의 문광서원이 발행했다. '신약 마가전 복음서언해'는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인 이수정이 1885년 일본에서 한문과 우리말로 번역해 펴낸 책이고, '구약전서'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서다. 또 '예수성교전서'는 1887년 제작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다.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