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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교육청 임태희 교육감 “대한민국이 어떻게 오늘을 이뤄냈는지 교육해야”임태희 경기교육감이 15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에서 축사하고 있다[사진제공=경기도교육청 제공] (국민문화신문) 구명석 기자=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이 대한독립과 만세운동 계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적 있는 교육으로 대한민국이 어떻게 오늘을 이루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고 강조했다. 임 교육감은 15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임 교육감은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은 평화와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그동안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많은 분의 역사를 되새기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경기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으로 대한민국이 어떻게 오늘을 이루고 있는지 분명히 알도록 가르칠 것”이라며 “평화와 정의가 정말 중요한 가치인지를 알도록 교육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 교육감은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이 경기도를 넘어 대한민국 모든 학생에게 역사를 생각하고 우리의 뿌리를 생각하는 장소, 미래 세대를 위한 배움과 교육의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화성시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과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인근에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고 이날 개관식을 했다. 독립운동기념관은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인근 3만7000㎡ 부지에 지상 1층, 지하 1층, 연면적 5414㎡ 규모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상설·기획·아동 전시실과 수장고, 교육·관리시설 등 기념관과 역사문화공원 등이 갖춰졌다. 상설전시실에서는 16일부터 개항기부터 광복까지 화성독립운동사를 주제로 한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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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항일(抗日)과 친일(親日)’을 주제로 한 특별전 4월 27일 개막(국민문화신문) 유석윤 기자 =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관장 김기섭)은 오는 4월 27일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 년 전 그들의 선택》을 개막한다. 이 전시는 경기도 31개 시군의 항일독립운동과 친일파(親日派)에 대해서 조명하는 특별전으로, 한말~일제강점기에 경기도에서 펼쳐진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의 장소 및 인물을 기리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얻은 친일파 및 일제잔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역사의 엄중함과 국가·공동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자 기획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국권 강탈은 조약 형식을 띠었으므로 이에 협조하는 친일파들이 있었고, 시간이 흘러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국내외의 항일운동과 무장 독립전쟁이 본격화하였다. 근대 이후 한국은 수십 년간 식민지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났지만, 치열한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그 역사가 초라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전시 담당자의 설명이다.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며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1백 년 전 깊은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측했을까? 1백 년 전 우리는,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전시실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물음표가 가득하다. 이 전시는 경기도의회가 지난해 5월 20일 제정한 ‘경기도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에 따라 기획한 것이다. 또 최근 수년간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경기문화재연구원, 지역문화교육본부, 경기도박물관)이 수행한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문화유산 실태조사 보고서’(2017), ‘경기도 항일운동유적 안내판 설치사업’(2018~2019), ‘경기도 항일운동 문화유산 조사사업’(2019~2020), ‘경기도 항일운동 인명록 발간’(2020),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사업’(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 사업’(2021), ‘친일문화잔재 청산을 위한 독립운동 유물구입’(2021) 등 여러 사업의 결과물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제감시대상카드,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현충시설 자료, 문화재청의 자료 등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조병세, 김병엽, 박찬익 관련 유물 등 그간 경기도박물관이 기증받은 근대 및 독립운동 관련 유물이 이번 전시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과 함께 안성3.1운동기념관,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양평 몽양기념관, 여주박물관, 수원박물관,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용인문화원 등 경기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유관 기관 및 단체, 개인 소장가 등 여러 곳으로부터 유물과 자료, 이미지와 영상물 협조를 받았다. 주요 전시품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서화, 판화, 유화, 사진, 신문, 도서, 엽서, 영상물 등 200여 점이며, 제1부 ‘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 제2부 ‘항쟁과 학살, 그날 그곳을 기리다’, 제3부 ‘친일(親日)과 일제잔재(日帝殘滓)’, 제4부 ‘유물로 만나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가’ 등 모두 4부로 구성하였다. 제1부(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는 한말과 대한제국기에 펼쳐지는 일본제국주의 국권침탈의 모습을 그린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정미의병(1908) 관련 유물과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열사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이한응의 유품과 무장독립항쟁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한 이석영 6형제에 관한 영상물, 지조를 지키는 마음을 표현한 윤용구, 안중식, 오세창, 한용운의 서화 등을 전시한다. 제2부(항쟁과 학살, 그날 그곳을 기리다)는 3·1독립만세운동과 화성 제암리 학살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한다. 국내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운동은 총 1,692회에 최대 100만 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이었다. 경기도는 타 지역에 비해 지속적이면서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총 367회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고, 참여인원도 17~20만여 명에 이르러 가장 많았다. 이에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만행사건이 일어났다. 전시실에 걸린 대형 유화 〈제암리 뒷동산 만세소리〉(1983년, 김태 작)와 영상물 〈4월의 어느 날〉(2분 50초)은 화성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서 빌린 것이다. 제3부(친일과 일제잔재)는 경기도의 대표적 친일파 10명(이완용, 송병준, 박제순, 이재곤, 박영효, 박필병, 민원식, 홍사익, 조희창, 홍난파)과 송병준·송종헌 부자의 공덕비 및 팔굉일우(八紘一宇, 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관련 자료와 탁본을 전시한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파(親日派)를 “을사늑약(1905) 전후부터 해방(1945)까지 일제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한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서 활동 흔적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일제잔재(日帝殘滓)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 기간에 일본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생산되거나 정착하였음에도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유무형의 부정적 유산”,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무형의 유산”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4부(유물로 만나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는 경기도 출신 중 주요한 독립운동가 류근, 여운형, 조소앙, 조성환, 박찬익, 안재홍, 신익희, 엄항섭 등의 유물을 전시한다. 특히 여주박물관이 소장한 조성환 선생의 유품, 경기도박물관이 기증받은 파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 일가의 유품, 평택의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가 소장한 안재홍 선생의 유품 등이 전시된다. 전시장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제작한 주홍 작가의 샌드 애니메이션 〈도마 안중근〉을 비롯하여 모두 8개의 영상물이 상영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과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우리 지역 일제잔재를 찾아라』의 PC 검색 코너, 경기일보의 기획기사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등을 QR코드로 확인하는 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문화재청이 최근 국가 보물로 지정한 ‘데니 태극기’ 등 3종의 태극기를 소개하였다. 포토존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현재의 국회) 사진을 활용하였으며, 체험존에서는 ‘소망나무에 메세지 달기’, 태극기를 활용한 ‘태극 바람개비 만들기’, ‘나라사랑 태극기 만들기’ 등을 직접 해 볼 수 있다. 전시 개막식은 4월 27일 오후 3시에 개최하며, 개막식에 앞서 2시부터는 축하공연으로서 안중근의사 음악연가 〈하얼빈의 열 하루〉를 상연한다. 이 공연은 2021~2022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공모지원 사업 선정작 중 하나이다. 전시 기간 중에는 전문가 연계 특강을 2회 진행한다. ‘경기도의 항일과 친일’을 주제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5월 25일)과 이지원 대림대학교 교수(8월 17일)가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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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 열려화성 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103주년을 맞아 15일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에서 추모제를 거행 (국민문화신문) 유석윤 기자 = 화성시가 화성 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103주년을 맞아 15일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에서 추모제를 거행했다. 이날 추모제는 제암·고주리에서 희생당한 29인의 선열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암·고주리 29인의 동행’이란 주제로 화성시장을 비롯해 안소헌 광복회 화성시지회장, 원유민 화성시의회장, 순국선열 유족 대표, 화성독립유공자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식에 앞서 선열들이 모셔진 합동묘역에 헌화 및 참배가 있었으며, 국민의례, 29인 촛불영상 및 주제영상 상영, 추모사, 추모공연, 추모퍼포먼스 등이 진행됐다. 특히 이날 추모공연은 화성시 청년예술단 MIH가 맡아 희망가, 꽃날, Hwaseong of 아리랑, 아름다운 나라 등 국악공연을 선보였으며, 유가족과 내빈들이 함께 하는 동행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화성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전 세계는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다”며, “3.1운동 항쟁지이자 4.15 학살사건이 벌어진 이곳 제암리가 화성시를 넘어 세계평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시는 이날 추모제를 시작으로 16일부터 30일까지 경기도 최초로 메타버스 온라인 추모관을 열고 캐릭터로 체험하는 3.1만세길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할 예정이며, 오는 16일 오전 11시에는 동탄다원이음터 대강당에서 심용환 역사강사를 초빙해 ‘1919 우리들의 시작,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야기’특강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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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경기도 내 최대 독립운동기념관 및 역사문화공원 착공향남읍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에서 착공식. 사진 = 화성시청제공 (국민문화신문) 유석윤 기자 = 화성시가 9일 향남읍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에서 독립운동기념관 및 역사문화공원 착공식을 개최했다. 총 21,322㎡(6,450평)의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1층 건축 연면적 5,310㎡(1,606평) 규모로 경기도 내 최대 규모이다. 시는 총 424억 원을 투입해 오는 2023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기념관에는 상설, 기획, 아동전시실과 수장고, 교육 및 관리시설이 들어서며, 공원에는 자연을 모티브로 한 산책로와 휴게공간이 조성될 예정이다. 서철모 화성시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우리 시 대표 명소가 될 것”이라며, “조국광복과 주권회복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고 선양하는데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착공식에는 화성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서철모 화성시장, 안소헌 광복회 화성시지회장, 원유민 화성시의회 의장, 송선영 시의원, 황광용 시의원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기념사와 퍼포먼스, 시삽 등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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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의회 하연자 의원, 용인시를 무장항쟁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제안용인시의회 하연자 의원은 지난 9일 제256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용인시를 무장항쟁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제안을 했다.(사진제공=용인시의회) (용인=국민문화신문) 구명석 기자=용인시의회 하연자 의원(구성·동백1·동백2·동백3동/더불어민주당)은 지난 9일 제256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용인시를 무장항쟁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제안을 했다. 하 의원은 경기도 관내 31개 시·군 중 화성 제암리 3.1운동 유적지 및 기념관, 안성 3.1 운동 기념관을 제외하고는 경기도에 제대로 통합된 독립운동기념관은 없는 상태이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도 차원의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한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유일하다고 언급했다. 이어, 고려 고종 19년인 1232년 몽골의 침공을 물리친 김윤후 장군, 만주 지역의 독립군 최고 지도자 김혁 장군, 민족학교인 삼악학교를 설립한 여준 선생님 등 타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장군과 애국지사들을 배출한 곳이 용인이라며, 문화유산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역사·교육·문화적 관점에서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대한민국의 중요한 거점도시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 번째로 조속히 경기도와 협의해 무장항쟁의 성지이자 수도인 용인시에 3D를 이용한 온라인 체험관, 전투체험 가상공간, 독립 영화 및 애니메이션 영화관, 100년 전 타임머신 체험관, 1일 독립군 체험관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접목한 '경기도독립운동기념관' 건립 추진을 요청했다. 두 번째로 용인시를 '대한독립 무장항쟁의 수도 용인'으로 특허 출원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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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역사의 장 연세대 언더우드가기념관, 문화재로 등록서울 연세 대학교 언더우드 가옥 전경. 사진 제공: 연세대학교 (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문화재청은 최초의 복음 선교사이자 한국 근대교육에 헌신한 언더우드 가문을 기리는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문화재로 등록했다고 5일 밝혔다. 국가 등록 문화재 '언더우드 가옥'은 최초의 복음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이자 연희전문학교의 제3대 교장 원한경 박사가 1927년에 거주 목적으로 건립한 주택이다. 이 사택은 연희 교육과 기독교 선교의 요람이 되었다. 1974년 원한경 박사의 아들 원일한 박사가 이 사택과 주변 토지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해 2003년 이곳을 “언더우드가 기념관”으로 이름하여 대를 이은 소명과 유덕을 기리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가 기념관은 대학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캠퍼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의 역사적 흔적들이 건물 곳곳에 남아 있으며, 독특한 건축형태와 함께 근대기 서양 주택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30년대 내부 모습을 최대한 되살렸으며, 언더우드가의 사진 및 서적 등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지난 2016년 11월 연세대 언더우드가 기념관의 지하 보일러실에서 누전으로 발생한 불이 번져 지붕이 타는 화재사고가 있었다. 이에 기념관은 폐쇄되면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지만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1년 반에 걸쳐 복원해 재개관했다. 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가 기념관 전시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가 기념관 전시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기념관 전시실에는 언더우드 가문의 생활을 담은 사진첩이나 기증된 도서 및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고종이 원두우 선교사에게 하사한 검, 명성황후가 원두우 선교사의 부인에게 하사한 손거울 복제품 등 조선 황실과 초기 기독교 선교사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물품이 있다. 언더우드가 기념관에는 연세 대학교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정신과 헌신 등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담겨 있다. 최초의 복음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이자 연희전문학교의 제3대 교장 원한경 박사가 1927년 2층 건물로 지은 사택으로 시작된 기념관은 언더우드 가문이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구제 및 교육 활동을 이어간 곳이다. 136년에 걸쳐 4대째 기독교 정신으로 한국 사랑을 실천해온 언더우드가는 이 땅의 어느 누구 보다도 광복과 한민족의 통일을 꿈꿔왔다. 특히, 6·25전쟁이 발발하자 원한경 선교사는 민간고문단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들어왔으며, 3명의 아들들도 자진해서 참전했다. 장남인 원일한과 3남 원재한, 4남 원득한이 해군 군목과 통역 요원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진해서 6·25전쟁에 참전한 언더우드가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화제가 됐으며, 수많은 미국 방송과 신문이 이들 부자의 한국 사랑 이야기를 다뤘다. 언더우드가는 4대에 거쳐 한국에 살며 교육, 선교, 의료,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관계 맺으며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가문이었다. 1885년 기독교 선교사의 자격으로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뎠던 언더우드 목사는 교파 간의 차이를 초월한 선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학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근대 고등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활동했던 원한경 박사는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서 이상교육 실현에 이바지했다. 식민지 시기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수촌리 화수리 등의 학살 사건을 직접 조사하고 그 증언을 정리해 세계 언론과 교회 기관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최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원일한은 아버지 원한경과 더불어 한국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해 당시 UN 통역사로 활동하며 동생들과 함께 휴전 회담이 성사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언더우드 가문의 이러한 절대적인 한국사랑은 4세 원한광의 형제들로까지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보낸 120년이라는 시간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부이자, 한국 기독교 역사의 모두’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 등록 문화재로 등록된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관리·운영하는 우리 대학교 박물관은 “가옥의 형태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격동의 역사를 한국인들과 더불어 헤쳐온 언더우드 일가의 헌신적인 삶이 함께 평가된 것으로 이해된다.”며 “연세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언더우드 일가의 삶과 업적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한국 선교와 대학교육의 역사를 느끼고 배우는 교육의 공간이며, 또한 소중한 기록유산의 보고(寶庫)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가 기념관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공휴일 제외)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며 미리 예약한 단체에게는 전시 안내를 제공한다. 별관 등은 시간제로 대여하기도 한다. 다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는 현재는 오전 10시와 오후 1시, 3시 하루에 세 차례만 4명 이하의 인원으로 예약을 받아 개방한다. 136년에 걸쳐 4대째 기독교 정신으로 한국 사랑을 실천해온 언더우드 가문의 지혜와 헌신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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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제암리 대학살, 그 순교의 현장을 찾다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화성 제암교회 순교 유적지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저지른 양민 학살사건 현장이며, 순교의 현장이다. 화성지역 3.1운동이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일제의 행정기구인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우편국과 일본인 가옥들이 파괴되고, 일본인 순사 2명이 처단되었다. 일제는 화성지역의 강렬하고 거센 3.1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특별검거반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소재하는 제암리 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 권사가 1905년 8월 5일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다. 제암리 마을은 씨족 중심 농촌 마을로, 3. 1운동 당시 총 33가구 중 2가구를 제외한 31가구가 순홍 안 씨로, 안 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 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해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마련했다. 후세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전시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의 배경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가던 당시 제암리 교회 교인들과 주민들은 장날이었던 3월 31일에 발안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사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도자를 체포했다. 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부터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 시위를 이어간다.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사건의 진행 일제는 1, 2차에 거쳐 수촌, 화수리를 습격해 마을을 불태우고 지도자들을 잡아들였다. 당시에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일본 육군 제79보병연대 소속의 중위 아리타 외 11명의 보병이 4월 13일에 발안 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제암리의 지도자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음을 알았고 제암리를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4월 15일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던 사사카, 순사보 조희창, 일본인 순사 1명을 대동하고 제암리로 이동했다. 이들은 병력을 나눠 주민들의 퇴로를 봉쇄했고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다. 명단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들까지 불러 모았고 아리타 중위가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교회를 포위하고 있던 보병들이 일제히 사격했으며 이후에는 석유를 이용해 불을 질렀다. 제암리에서 23명 살해되었다. 또한, 당시 바람이 많이 불어 교회 아랫집들은 불이 옮겨붙었으며 불이 붙지 않은 윗집까지 일일이 태우고 다녔다. 사건 후 일본의 반응 일본은 무장한 폭도들의 저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하였고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다. 재한 일본인들의 생각 역시 다를 게 없어서 이는 조선인들의 독립이라는 망상이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에 의해 진실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일제는 당혹스러워했지만 지속적으로 정당방위를 강조했다. 세계의 여론이 악화되자 복구비를 내놓고 조선 총독이 현장을 방문하였다. 또 주범 육군 중위 아리타를 군법 재판에 회부하였다. 하지만 이는 악화된 여론을 달래기 위한 기만책이었고 여론이 잠잠해지자 아리타 중위는 나중에 무죄 방면된다. 스코필드 박사 동상. 서구의 반응 4월 6일에 일어났던 수촌리 방화에 대한 소식을 듣고 4월 16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이동하던 선교사 스코필드, 커티스, 언더우드 등의 귀에 이 비극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들은 제암리로 가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뒤 본국의 교회에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때문에 일제는 곤혹스럽게 된다. 선교사들은 본래 정치적인 중립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3.1 운동 당시 비무장인에 대한 폭력적인 행태를 보고는 마음을 바꾸었고 적극적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해 각국 영사관에 항의와 요청을 하였다. 이들의 요청 때문에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에서는 파악에 나섰다. 이들은 수촌리와 제암리 사건 현장으로 안내해 실상을 알렸고 본국으로 이를 알려 진실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이 일제에 불리하게 돌아가도록 했다. 이중 주목할 만한 사람은 프랭크 스코필드다. 그는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로 일제의 만행을 지속적으로 언론에 투고했으며 이 때문에 미움을 사서 귀국하게 된다. 스코필드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스코필드는 일본 헌병 몰래 현장 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야만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뉴욕 타임스의 1919년 4월 17일 자 기사는 임시정부인 ‘한성 정부 수립’ 소식을 알렸고 한국인의 만세 시위를 ‘평화 시위’, ‘평화 혁명’이라 불렀다. 4월 24일 자 기사에서는 “일본군은 서울 동남방 45마일의 촌락에서 남성 기독교인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총살하고 대검으로 찔러 무참히 죽였다. 일본군은 만행 후 그 마을의 교회와 그 밖의 건물들을 불태워 없앴다.”라고 보도했다. 제암리 교회당 1969년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리 교회당을 재건하였는데, 일본 기독교인들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현장을 찾아 전모를 확인하고 일본 내 기독교 신문에 고발기사나 추도시를 실었다. 이 교회당은 3.1운동 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고 지금은 그 옆에 제암리 교회가 건립되어 있다. 화성지역 3.1운동 의의 백 년 전 3.1운동과 화성 전역을 울리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세상을 바꾸는 불씨가 되었다. 화성 3.1운동의 저항과 독립,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향한 불굴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위대한 자산이 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수많은 독립운동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을 잘 설명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순교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고 본받아 평화와 자유를 위한 헌신의 발판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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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립예술단, 화성 3.1운동 유적지(수촌교회)에서 특별공연화성 3.1운동 유적지(수촌교회)에서 특별공연수원시립합창단과 수원시립교향악단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5일 3.1운동 유적지인 화성시 수촌교회를 방문해 3.1운동 당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특별 공연을 했다. 이번 공연은 조인연 수촌교회 담임목사 초청으로 이뤄졌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지난 2월 7일 서철모 화성시장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교류·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화성시를 찾았는데, 간담회에 앞서 수촌교회를 방문한 바 있다. 조인연 목사는 염태영 시장에게 “수원시립예술단이 수촌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공연을 해주셨으면 한다”고 요청했고, 염 시장이 수락하면서 이날 공연이 열리게 됐다. 수촌교회는 수촌리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교회다. 일본 순사들은 1919년 4월 5~8일 수촌리를 포위하고, 수촌교회와 마을에 불을 질렀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탔고, 수촌교회도 전소됐다. 많은 주민이 사망하고 다친 참사였다. 100년 전 아픔을 보듬고, 기억하는 시간이었던 이날 공연에는 수촌교회 신도와 마을 주민을 비롯해 염태영 시장, 안민석(더불어민주당) 의원, 화성시 관계자, ‘수원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들이 함께했다. 수원시립합창단·수원시립교향악단은 ▲독립 군가 ▲아름다운 나라 ▲압록강 행진곡 ▲아리랑 ▲아! 대한민국 등을 부르고, 연주해 큰 박수를 받았다. 박지훈 수원시립합창단 예술감독이 지휘했다. 공연을 관람한 염태영 시장은 “100년 전 오늘 수촌리 민중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가 일제의 총탄에 쓰러졌고, 수촌교회와 마을은 불탔다”면서 “수촌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당부했다. 이어 “1919년 3월 1일 수원 방화수류정에서 타오른 횃불은 화성 장안면으로 이어졌고, 수원·화성 민중은 수원군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며 “오늘 공연이 역사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넘어 수원·화성시가 상생·발전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염태영 시장, 서철모 시장을 비롯한 수원·화성시 관계자들은 2월 7일 간담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에 협력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하기로 약속했다. 4월 15일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에 열리는 제암·고주리 학살 100주년 추모제에는 수원시민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1982년 창단된 수원시립예술단은 수원시립교향악단·수원시립합창단·수원시립공연단으로 이뤄져 있다. 다채로운 정기·기획 공연으로 시민과 음악애호가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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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와 딜쿠샤' 유물 최초 공개[사진] 앨버트-메리 테일러 부부 1919년 3.1운동과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 당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단통치 실상과 우리 민족의 평화적‧비폭력 저항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미국 AP통신사 임시특파원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lyor). 고종황제의 국장행렬 사진 등 그가 남긴 유품과 앨버트-메리테일러 부부가 서울에 짓고 살았던 가옥 ‘딜쿠샤’의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앨범, 또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lyor)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생활을 중심으로 집필한 자서전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의 초고 등 테일러 가문의 자료가 최초로 공개된다. 딜쿠샤(Dilkusha, 서울 종로구 사직로2길 17)는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 건축해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약 20년 간 아내와 함께 거주했던 집이다. 영국과 미국의 주택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일제 강점기 근대건축의 발달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는 딜쿠샤를 원형 복원해 시민에게 전면개방할 계획으로, 현재 복원작업을 위한 본공사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관련 유물을 우선 공개한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은 기증유물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展」을 11.22.(목) 15시 개막식을 시작으로 내년 3.10.(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B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를 통해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린리 테일러(Jennifer Linley Taylor)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딜쿠샤 및 테일러 가문 자료 총 1,026점 중 310점이 선보이게 된다. 제니퍼 L. 테일러는 22일(목) 개막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테일러 부부가 1917년~1942년 서울(경성)에서 살며 남긴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딜쿠샤의 당시 모습과 이들의 행적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제니퍼 L. 테일러는 2016년 3월 딜쿠샤 관련 자료 30여 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2018년 3월까지 총 1,026점을 기증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 자료들을 토대로 딜쿠샤 복원 및 이번 전시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으며, 이번 전시를 통해 그간의 연구성과를 처음으로 시민에게 공개하고자 한다. 기증유물뿐 아니라 앨버트 테일러가 취재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린 1919년 당시 신문기사(뉴욕타임즈와 더 재팬 어드버타이저)도 첫 공개된다. 또, 테일러 부부가 딜쿠샤에 거주할 당시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1층 벽난로와 창문도 당시 사진과 기록물을 토대로 전시장 내부에 재현된다. 이번 기증유물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전은 1917년부터 1942년까지 한국에 거주하였던 테일러 부부의 행적을 밝히고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거주한 서양인 관련 자료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3대에 걸친 테일러 가문의 자료들, 즉 3.1운동 관련 기사, 딜쿠샤 유물, 금광개발 관련 자료 등은 당시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니퍼 L.테일러는 “테일러 가문 및 딜쿠샤 자료는 내가 소장하는 것 보다 한국에서 보존하는 것이 더 의미있다. 이 자료들은 3.1운동을 알린 할아버지 앨버트 테일러의 추모와, 딜쿠샤 복원사업에 활용될 수 있다.”라며 “이번 기증유물특별전을 통해 내가 기증한 자료가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제니퍼 L. 테일러가 기증한 호박목걸이, 편지, 사진첩, 경성의 도시 사진과 풍경화, 태극기와 공예품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깊은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회는 시민들이 테일러 부부와 딜쿠샤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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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이주민 롤모델 언더우드 서거 100년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이자 언더우드 선교사 사택으로 쓰인 정동 사랑채. [새문안교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부활절이던 1885년 4월 5일, 일본을 떠나 제물포항에 들어온 한 상선에서 벽안의 두 청년이 내렸다. 미국의 북장로회가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元杜尤)와 미국 감리회 소속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당시 각각 27세와 26세로 연부역강하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열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선교의 씨앗을 심는 한편 근대적 교육기관의 효시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두 사람이 우리나라를 찾은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 피에르 모방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보다 4년 앞선 1832년, 네덜란드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가 중국 연안에서 풍랑을 만나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에 정박했다가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눠줬다. 1866년에는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들어왔다가 주민과 갈등을 빚어 선원들과 함께 숨졌다. 1884년에는 평신도 의료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이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으로 파견돼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왕실 의사가 됐다.그러나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목적을 띠고 입국한 뒤 신도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운 개신교 목회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이었다. 출발은 언더우드가 빨랐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방한 이틀 뒤 서울에 입성했고,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온 아펜젤러는 서울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5월 3일 다시 제물포로 입항했다.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가 정동의 가옥 한 채를 빌려 고아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5월 11일 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을 개교했고 1905년 경신학교로 개명했다. 1915년에는 조선기독대를 설립했는데,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받은 뒤 해방 후 연희대를 거쳐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와 합쳐져 오늘의 연세대가 됐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교육사업에 나섰다. 고종은 이듬해 6월 8일 '인재를 기른다'는 뜻의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며 격려했다. 1885년 5월 3일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메리 스크랜턴은 이듬해 최초의 여성 근대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고,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빈민 의료 봉사와 선교에 나섰다.언더우드(원두우) 선교사의 손자인 원일한 교수에게 1973년 9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국민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교회를 세운 것도 언더우드가 먼저였다. 1886년 7월 11일 자신의 두 번째 조선어 선생인 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준 데 이어 1887년 9월 27일 정동의 자기 집 사랑방에서 14명의 교인과 함께 첫 예배를 올렸다. 한국장로회와 새문안교회는 이날을 뿌리로 삼고 있다. 언더우드보다 앞선 1886년 4월 25일 부활절에 주한 일본대사관 직원에게 첫 세례를 준 아펜젤러도 정동의 조그만 집 한 채를 사들여 '벧엘예배당'으로 꾸민 뒤 1887년 10월 9일 첫 예배를 보았다. 한국감리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오늘날 장로교와 감리교는 한국 개신교의 80%를 넘는 교세를 자랑한다. 언더우드는 한국어소사전과 찬송가 등을 펴냈고 아펜젤러,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한글 성경을 보급했다. 이 모임에서 '여호와'를 '상제'로 번역할지 '하나님'으로 옮길지, 'eye of needle'을 '바늘귀'로 할지 '바늘눈'으로 쓸지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빵'은 당시 조선에 없었던 탓에 결국 '떡'으로 표현하기로 결정됐다.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에도 앞장선 1903년 언더우드는 초대 회장을 맡아 청년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한편 야구·농구·체조 등의 서양 근대 스포츠 보급에 나섰다. 1889년에는 명성황후의 시의로 일하던 제중원의 여의사 릴리어스 호턴과 결혼해 외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를 낳았다. 언더우드는 건강이 악화해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0월 12일 그곳에서 소천했다. 뉴저지 교회묘지에 묻혔다가 유족의 뜻에 따라 1999년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이장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려고 배를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해 익사했다.언더우드 가문의 3대, 4대, 5대 후손들이 2012년 6월 서울 신촌의 연세대를 방문해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연세대 제공]아펜젤러의 아들딸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발전시키는 데 헌신해 귀감이 됐지만 4대에 걸친 언더우드 일가의 한국 사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원한경은 3·1운동 때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등을 세계 교회와 언론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아들 원일한과 투옥됐다가 1942년 강제 추방됐다. 원한경은 광복 후 미국 육군성 통역요원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으나 부인 와그너가 좌익청년들에게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6·25가 터지자 민간 고문단으로 활약하다가 1951년 2월 부산에서 숨졌다. 장남 원일한은 연희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고 유엔군 정전협상 수석통역장교를 맡았다. 3남 원재한과 4남 원득한도 각각 미군 군목과 통역요원으로 참전했다. 언더우드의 증손자 원한광은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4년 11월 한국을 떠났고, 원한석은 한국에서 경영컨설턴트로 일하며 '퍼스트 무버' 등의 저서를 펴냈다.19세기 말 개화기에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서양인 가운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며 헌신한 인물은 드물다. 더욱이 언더우드 가문처럼 100여 년간 누대를 이어오며 기독교정신에 입각해 봉사를 실천한 집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주민 가족의 롤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는 12일은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난 지 꼬박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는 개신교단들은 힘을 합쳐 전도에 나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에큐메니컬(교회 일치주의) 운동을 본받고, 학교를 사리사욕에 이용한다고 손가락질받는 몇몇 사학 설립자 집안들은 신교육의 요람을 만든 선교사들에게 육영사업의 참뜻을 배우며, 외국 국적을 병역 기피와 탈세에 이용하는 일부 부유층·권력층 인사들은 언더우드 일가를 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되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