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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특례시, ‘제1회 지방행정혁신대상’ 우수상 수상용인특례시가 한국지방자치학회 주관 '제1회 지방행정혁신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사진은 지난22일 서울 숭실대학과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시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국민문화신문) 최은영 기자 = 용인특례시(시장 이상일)는 (사)한국지방자치학회가 주관하는 ‘제1회 한국지방자치학회 지방행정혁신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고 23일 밝혔다. 시는 ‘함께 만드는 미래, 용인 르네상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혁신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저비용·고효율의 생활 밀착 정책으로 시민 편의를 증진하고 중앙부처 공모사업 참여 활성화 계획으로 국비 확보에 노력하는 용인특례시만의 차별화된 행정 서비스로 시민 삶의 질을 높인 점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시 관계자는 "민선8기 시정의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해 얻은 성과로 지방행정혁신대상 우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돼 기쁘다”며 “앞으로도 용인특례시의 발전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지속해서 도입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사)한국지방자치학회는 지방자치 발전에 탁월한 성과를 나타낸 지방자치단체를 표창하기 위해 올해부터 ‘지방행정혁신대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주요 평가 기준은 혁신 사례의 시의성과 효과성, 혁신성 및 창의성, 지속가능성 및 수용성, 비용 합리성 및 효율성 등이다. 시상식은 지난 22일 서울시 동작구 숭실대학교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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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세계유산 남한산성 국내학술토론회 ‘기록으로 본 남한산성에 대한 기억(記憶)’ 개최(국민문화신문) 지문일 기자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원장 이지훈)은 2022년 11월 18일(금) 10시부터 경기문화재단 인계동 사옥 3층 다산홀에서 2022년 세계유산 남한산성 국내학술토론회 ‘기록으로 본 남한산성에 대한 기억(記憶)’을 개최한다. 올해 학술토론회는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와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간의 지속적인 협력과 연차적 학술토론회 개최 및 연구사업으로 새롭게 남한산성의 인문학적 가치를 구명하기 위한 ‘남한산성과 기록’을 세부 주제로 선정하였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기록으로 본 남한산성에 대한 기억(記憶)’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우리시대의 남한산성은 어떠한 의미인가를 남한산성과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자료를 연구, 소개한다. 이를 통해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할 수있는 방안 등을 모색하고 향후 다양한 형태의 문화유산 원형 복원 및 학술연구 활동에 많은 성과를 함께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는 지난해까지 진행되었던 비대면 온라인 방식이 아닌 현장에서 생동감 넘치는 학술대회 행사가 진행될 예정으로, 기조연설자인 명지대학교 홍순민 교수가 ‘역사기록과 남한산성에 대한 재발견’ 주제로 발표로 시작한다. 이어 6개의 주제발표가 이어질 예정인데,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속잡록》에 기록된 남한산성과 인식’은 김경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홍경모의 《중정남한지》에 나타난 남한산성의 인식과 의미’는 김봉좌 성신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이, ‘조선시대 병자호란 실기로 보는 남한산성의 안과 밖’은 장경남 숭실대학교 교수가, ‘조선후기 관찬서를 통해 본 남한산성’은 강석화 경인교육대학교 교수가, ‘남구만의 《약천집》을 통해 본 조선후기 남한산성’은 김일환 동국대학교 교수가, ‘정조와 《홍재전서》에 나타난 국왕의 남한산성 인식’은 송혁기 고려대학교 교수가 발표를 맡았다. 남한산성과 관련된 인물들과 기록들을 섬세하게 소개하면서도 상당히 다양하게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들이다. 이어서 각 주제발표의 토론으로는 김웅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조낙영 서울대학교 교수, 허태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안광호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최성환 서울대학교 교수,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등이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발표자와 토론자 전원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은 “항전의 시대, 축성 400년 남한산성 재조명 ‘기록으로 본 남한산성에 대한 기억’ - 우리시대의 남한산성은 어떠한 의미인가.”라는 내용으로 오수창 서울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종합적인 고찰이 이루어진다. 참여를 원하는 경기도민 및 시민들은 포스터에 QR코드로 연결된 사전신청을 검색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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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숭실대, 그 역사를 담아내다숭실대학교. (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올해 개교 124주년을 맞이하는 숭실대학교(총장 장범식)는 1897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많은 역사와 아픔이 담겨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숭실대학교는 ‘진리와 봉사’를 건학이념으로, ‘통일시대의 창의적 리더’를 인재상으로 하여 혁신을 이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숭실대학교의 역사는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의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숭실 학당에서 시작된다. 숭실 학당은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참된 교사와 교역자 양성이라는 설립 목적 아래 중등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숭실 학당은 1900년 가을 신학기부터 수업연한 5년의 중학과정인 숭실학교로 발전하여 1904년 5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숭실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민족의 독립에 이바지할 젊은 인재를 양성했다. 대다수졸업생들이 교역자·교육자로 활약했으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졸업생도 상당수가 있다. 최초의 근대대학 숭실대학교는 1906년에 4년제 대학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과정의 교육을 실시했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했으며, 교명은 ‘Union Christian College’, ‘평양예수교 대학’ 또는 ‘평양숭실대학’이라고 했다. 숭실대학은 미장로교 선교부가 주체가 되어 세워졌지만, 선교사들과 한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민을 위한 ‘기독교정신’과 평양주민들의 교육구국을 위한 ‘민족정신’이 결합되어 설립된 기독교 대학이었으며 근대민족대학이었다. 숭실대학은 근대학문체계를 최초로 도입하여 교육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학교육의 효시가 됐다. 숭실대학 교육. 숭실대학 교과서. 숭실대학 초기 교과는 성경, 수학, 물리학, 자연과학, 역사학, 인문과학, 어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개설됐다. 초기 교재는 주로 미국에서 사용하던 교과서를 번역, 재편집하여 인쇄했다. 숭실대학에서 운영하던 기계창에서 등사하여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한글 활자를 구비한 일본 요코하마[橫濱]의 복음출판사에 보내어 인쇄했다. 이후 대학 내에 출판부를 설치하고 교과서를 비롯하여 기독교 서적 및 각종 학술서적을 간행했다.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항했다. 이는 숭실대학이 기독교 정신 함양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는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지교육 강요로 인하여 1925년 전문학교로 개편됐다. 그러나 전문학교로 개편된 이후에도 대강당, 기숙사, 본관의 신축 및 증축을 통하여 교육 시설을 완비하고, 농과를 설치하여 농촌지도자를 배출하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최고 교육을 통해 숭실이 배출한 인재들은 교역자, 교사, 음악인, 학자 등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상당수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제강점기 숭실대학의 학생들은 전도활동을 비롯하여 음악, 체육, 문예 등 다양한 방면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한국민에게 희망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전도 활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근대음악의 도입에 초석을 닦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체육활동에서도 축구를 비롯하여 각종 종목에서 한국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문예활동에서도 한국의 훌륭한 문인들을 다수 배출했다. 근대적 문물수용에 앞섰고, 항일의식이 강했던 평양에서 출범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적 자존과 양심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한말 외교권 박탈에 항거하여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며, 많은 졸업생들이 신민회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주도했고, 평양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학생운동에 앞장섰다. 폐교관련 보도자료. 평양숭실 캠퍼스모형(1930년대). 또한,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숭실대학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1938년 3월 자진 폐교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민족혼을 지킴으로써 ‘기독교 대학’이자 ‘민족대학’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행동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숭실 동문들은 평양에 숭실대학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공산정권 수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5월 10일 서울 영락교회의 부속 건물을 임시교사로 하여 재건했다. 1957년에는 현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서울 숭실로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됐다. 1960년대 숭실대학 모형. 1967년에는 김형남 학장이 취임하면서 지난날 신문화와 과학문명 도입에 앞장섰던 전통을 되살려 공학부를 설치하고 국내 대학 최초로 전산교육을 실시했다. 1971년에는 대전대학교와 통합, 종합대학으로서의 체제를 갖췄고, 1983년에는 대전캠퍼스와 분리하여 유서 깊은 옛 이름 ‘숭실대학교’로 교명이 환원됐다. 현재 숭실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두고 지식 정보화 교육을 선도하는 등 첨단 교육환경을 배경으로 21세기를 선도하는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코로나 19 상황 이전부터 비대면 교육을 준비해온 숭실대는 지난 2018년 NHN와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클라우드 기반의 스마트 캠퍼스를 선도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 MOU’를 체결했다. 올해 3월 서버 안정화를 위해 기존 서버를 클라우드로 이관을 마쳤으며, 교수 대상 원격교육 역량강화 지원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지속될 비대면 수업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건물마다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강의실 6개 실을 확충하고 문제 해결 중심의 자기주도형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 인게이지드 러닝(Engaged learning) 강의실을 구축했다. 아울러 비대면 강의를 위한 신규 1인 스튜디오의 꾸준한 증설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숭실역사실. 숭실대학교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숭실대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숭실대학교 부속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찾아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에는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 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과 로마 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역사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기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한국의 역사와 배경,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배우고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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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김현승 시문학상<제7회 김현승 시문학상> 숭실대학교에서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갖는 다형 김현승 시인을 기리는 제7회 김현승 시문학상 응모작을 공모합니다. 평양 숭실전문 문과 학생이자 서울 숭실대학 문리대 교수였던 김현승 시인의 민족의식과 문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김현승 시문학상에 많은 응모 바랍니다.1. 응모 기간 : 2021년 4월 28일 수요일 ~ 5월 11일 화요일2. 응모 자격 : 전국 대학(교) 학부생 및 대학원생3. 작품 주제 : 제한 없음4. 응모 작품 수 : 시 5편5. 응모 방법 : 참가 신청서 1부 및 응모작품 5편을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 이메일(korlan@ssu.ac.kr)로 제출 (메일 제목 : [응모] '성명-대학명'으로 통일)6. 수상작 발표 : 2021년 6월 9일 수요일7. 시상 내역가. 당선작 1명, 상장 및 상금 (150만원)나. 가작 2명, 상장 및 상금 (각 7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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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 역사와 문화를 한 공간에 담다숭실대학교 한국 기독교 박물관. (서울=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숭실대학교 부속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정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약 1만 600여 점의 한민족 및 한국 기독교 관계 자료와 유물을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과 로마 시대의 유물을 다량 소장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층 한국기독교역사실과 2층 숭실역사실, 3층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 고고미술실 등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시민과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한국기독교문화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 교수의 일생에 걸친 열정과 그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고(故)김양선 교수가 미군정청으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아 1948년 4월 20일 서울 남산에 있는 옛 조선신궁 터에 ‘기독교박물관’과 ‘매산고고미술관’을 개관·운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하여 많은 자료가 분실되고 박물관 자리가 국회의사당 부지로 결정됨에 따라 1958년 2월 28일 폐관됐었지만, 그 후 김양선 선생의 민족문화와 기독교 문화 창달을 위한 숭고한 뜻에 의해, 1967년 10월 10일 숭실 개교 70주년을 맞아 숭실대학교 부속 박물관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실. 박물관 1층 한국기독교역사실은 한국기독교 역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경교 관련 유물들을 비롯하여 초기 천주교 교리서와 신앙서적, 박해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여 천주교의 수용과 자생적 천주교회 설립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개신교의 수용과정과 선교사 활동, 기독교의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는 한글 성경을 비롯한 다량의 자료가 전시되어있어 개신교의 발전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기독교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의 전사에 해당하는 경교로부터 시작한다. 경교는 기독교의 한 종류로 페르시아 지방에서 7~8세기 중국에 전래 되어 유행했던 기독교의 일파이다. 당시 당과 밀접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던 통일신라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교돌십자가. 전시실을 들어가자마자 바로 만나볼 수 있는 유물은 ‘경교 돌십자가’이다.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십자가 형태의 석물로, 8~9세기 무렵 경교가 우리나라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다. 한글 성경. 찬송가. 한국개신교는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국 선교사가 비기독교국가인 한국 땅에 공식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하여 읽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기독교가 외국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속에 형성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의 개신교 유입은 1832년 내한한 독일 출신인 선교사 귀츨라프와 1866년 이 땅에서 첫 순교자가 된 영국 선교사 토마스의 선교 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외국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여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켰고, 성경 번역과 문서선교를 통하여 신앙 확산에 노력하였다. 전도문서 출간. 조선성교서회는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및 정기간행물과 잡지류를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된 이래 1890년 ‘성교촬리’를 시작으로 ‘훈진언(1891년)’,‘쟝원량우샹론(1892년)’ 등 전도교리문서를 출간했다.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을 비롯한 초기 문서선교 사업은 기독교와 일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선교체제가 정착되어 가면서 점차 한글 성경 보급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7년 서울지역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누가복음전’을, 1892년 ‘마태복음전’을 발간했다. 그 후 성서 번역사업은 급진전되어 1900년 마침내 ‘신약전서’ 출판하게 된다. 번역위원으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레이놀즈, 게일, 스크랜톤, 최병헌 등이 활약하였다. 광범위하게 보급된 한글 번역 성경은 기독교계의 한글 교육과 계몽운동을 촉진하였고 한글의 민중문자화에 공헌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통치방식을 전환하면서 외견상 문화활동의 폭은 넓어졌다. 기독교계 역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문화 활동이 기독교 신문 잡지의 발간과 교육사업이다. 그리스도신문. 기독교 관련 서적의 발간으로 서구 신한과 문화를 국내에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적 기독교문화 창출에 기여하였다. 1897년 2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죠선크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였고,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가가 ‘그리스도신문’을 주간으로 창간했다. 1915년에는 양교파 연합으로 기독교 주간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였다.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도 한국교회는 기독교 문서운동, 주일학교 운동, 농촌운동 들을 통해 민족사회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30년대 들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함에 따라 기독교계는 크게 동요하게 된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교회와 교인들은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자발적 수용과 전파라는 역사적 경험 위에서 한국개신교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최대 교단이던 장로교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여 한국교회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조직은 정규 신학교육 및 주일학교 운동 등의 발전으로 더욱 그 토대가 강화되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송만영 관장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앞으로 각종 학술활동 및 사회교육활동 등을 통해 한국의 문화유산과 기독교 문화를 보다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한국기독교문화를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기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전반적인 기독교역사와 배경,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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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인생> 김범수 "난 상향평가돼…소리꾼 한길 가겠다"고 3때 친구 덕에 노래 재능 발견…빌보드 한국가수 첫 진입·국민 히트곡도 내데뷔 15년, 가장 빛난 무대는 '나는 가수다'…자작곡 채운 8집 계획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김범수(35)의 꿈은 복음성가(CCM)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인기와 부를 얻은 지금의 자리는 엄두도 내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여겼다. 올해로 데뷔 15주년을 맞은 김범수는 최근 강남구 신사동에서 한 인터뷰에서 "가수로서 지금의 위치가 내 나이와 경력에 비해 조금 더 상향 평가됐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종교 음악을 하고 싶었고 TV 출연하는 엔터테이너보다 대학로 어딘가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그렸으니 꿈이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은 셈이다. "달려와 보니 너무 과분한 자리에 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실 지금 출연 중인 엠넷 '슈퍼스타K 6' 심사위원도 누군가를 평가할 위치가 아니란 생각에 계속 고사했어요. 이승철, 윤종신 등의 선배들은 그 자리가 어울리지만 전 아니거든요. 그래서 심사도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조언을 해주자는 생각으로 임해요." 노래하는 재능을 발견한 게 고3 때였다. "음악은 카세트테이프가 닳도록 들었지만 이전까지 노래를 안 했다. 목소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내 인생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강서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부모에게 반항적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아웃사이더'였고, 친구들과 싸우기 일쑤였다.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없었다. 고교 3학년 때 정보통신과에서 만난 친구인 허석(기타리스트)이 교회에 나가 찬양팀을 해보자고 한 게 음악에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됐다. "허석은 신앙이 두텁고 착실한 친구였어요. 음악을 좋아하던 그 친구가 기타 치는 모습, 연주 소리가 너무 좋아서 교회로 따라나섰죠.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피아노를 둘러싸고 성가대 중창단이 연습하는 모습이었어요. 눈이 새롭게 떠지듯 신세계였어요." 이때부터 그는 성가대에서 활동했다. 성가대 친구들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했다. "가정 형편도 좋지 않아 옷도 못 입고 다녔는데 소리를 내니까 애들이 놀랐어요. 크리스마스 때도 솔리스트로 '오 해피 데이'를 불렀는데 음악적으로는 저의 첫 도전이었죠. 이때부터 동네에서 '노래 해봐라', '복음성가 앨범을 내보라'란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사실 중·고교 시절의 방황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며 시작된 도시 생활이 녹록하지 않은 탓이 컸다. 마산에서 그는 "장군동의 황태자였다"고 웃었다. "친척들이 동네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았어요. 먹고 싶은 건 슈퍼를 하는 할머니 집에서, 갖고 싶은 건 장사를 하는 이모 집에서 다 가질 수 있었어요. 이모와 여자 사촌들 사이에서 크며 사랑도 많이 받았죠. 그땐 생긴 것도 좀 귀여워 어딜가나 '예쁘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하하." 아버지가 먼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 관리를 맡으면서 상경한 그는 양천구 신월동의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 일은 순탄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인형 눈을 붙이거나 미싱을 돌렸다. 금실 좋던 부모님의 싸움도 잦아졌다. "겨울이면 연탄가스가 새어나와 어머니가 잠을 깨워 김칫국물을 먹이곤 했어요. 여름엔 침수로 물을 퍼냈죠. 마산 생활이 꿈만 같았어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반항적으로 변해갔죠. 학교와 사회에 앙심을 품은 거죠. 하하. 이때 부모님이 정말 힘들어하셨어요." 교회에 나가고 음악을 통해 심적인 안정을 찾아간 그는 허석과 함께 숭실대학교 사회교육원 실용음악과에 정원 미달로 들어갔다. 이때 스승으로 만난 사람이 가수 박선주였다. 박선주도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기획사 오디션 제의를 했다. 그가 "복음성가 가수가 되고 싶으니 대중음악 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박선주는 "가수로 잘 된 뒤 더 큰 영향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1997년 처음 오디션을 본 곳이 1990년대 인기그룹 알이에프(R.ef)가 있던 팀엔터테인먼트였다. "오디션을 보고서 합격했는데 댄스 가수를 전문으로 양성하는 것 같아서 '저랑 안 맞는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네가 원하는 알앤비(R&B), 솔(Soul) 음악을 시켜주겠다', '멀리 보고 키워주겠다'고 약속하셔서 도장을 찍었죠." 그러나 기획사와 음악 방향에 대한 마찰도 있었고 주위로부터 외모 지적도 받는 등 대중 가수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그땐 그런 게 서러웠는데 당시 회사 대표님이 아니면 난 데뷔를 못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데뷔는 '늪'으로 한창 인기를 끌던 '얼굴 없는 가수' 조관우를 벤치 마킹해 '제2의 조관우'로 콘셉트를 잡았다. 조관우의 앨범을 작업한 작곡가 하광훈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그래서 나온 게 1집(1999) 타이틀곡 '약속'이다. 그러나 '약속'은 그가 소화하기에 조숙한 노래였고 10만장도 나가지 않았다. '얼굴 없는 가수'로 데뷔했지만 앨범 반응이 없자 TV 출연을 감행했다. "그때는 앨범 판매량이 매일 집계되던 시절인데 제가 TV에 출연하자 시청자의 반감이 생겼는지 판매량이 뚝 떨어졌어요. '넌 앞으로 TV 출연할 생각 말라'는 말도 들었죠. 마치 제 얼굴 때문에 앨범이 망한 것 같아서 스스로 하찮은 인간 같았어요." 1집을 내고서 '투자 가치가 없으니 그만 접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기획사는 되레 송혜교, 송승헌 등의 스타가 출연하고 호주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2집(2000) 타이틀곡 '하루'다. 앨범 시장 침체가 시작된 상황에서 판매량 20만장을 기록했으니 '중박'이라고 여겼다. 이때 교민이 운영하는 미국 국도음반에서 연락이 왔다. '하루'를 영어곡으로 녹음해 김범수를 미국에 진출시키자는 제안이었다. "한국에서도 안 유명한데 사실 허황된 도전이었죠. 미국에서 제임스 잉그램과 함께 했던 프로듀서가 날아와 편곡했고 '하루'를 '헬로 굿바이 헬로'란 영어곡으로 녹음했죠. 그때로선 나름 치밀하게 준비했어요. 하하." 이 곡은 2001년 빌보드의 부문별 차트인 '핫 100 싱글즈 세일즈' 차트 51위로 진입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가수의 빌보드 진입은 처음이었다. 이때의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빌보드 차트를 인터넷에서 바로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여서 빌보드 잡지를 미국에서 받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이 소식이 기사화되자 사람들은 '사기가 아닌가'라고 수군댔다. 결국 김범수는 '9시 뉴스'에 출연해 이를 확인시키며 논란을 잠재웠다. "지금은 싸이 형이 빌보드 메인차트에서 2위를 하며 엄청난 역사를 썼지만 당시로선 빌보드의 벽을 송곳, 숟가락으로 살짝 파본 거죠. 돌이켜보면 가수 인생의 의미 있는 도전이고 흔적이에요. 그땐 두려움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가수로서의 절정은 3집(2002) 타이틀곡 '보고싶다'가 히트하면서다. 처음에 이 곡은 '국민송'으로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지만 드라마 '천국의 계단'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로 쓰이면서 국민 히트곡이 됐다. 이 드라마가 일본에 수출돼 그는 일본 진출 기회를 얻었고 2천~3천석 규모의 공연도 했다. "나에겐 어마어마한 노래"라고 했다. 팀엔터테인먼트에서 5집(2006)까지 낸 그는 기획사와 계약을 마무리하고 군 복무를 시작했다. 7년 동안 달려오며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터라 군대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됐다. 2007년 어느 날, 작곡가 황찬희의 소개로 지금의 기획사인 폴라리스엔터테인먼트 이종명 대표가 군대로 면회를 왔다. 황찬희는 1999년 삼수를 해서 입학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동기다. "신생 기획사였지만 대표님의 마인드가 좋았어요. 신앙도 같았고요. 제대 6개월 전부터는 매주 면회를 오셨는데 가수로서의 비전만 제시할 뿐 계약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그 시간이 기다려지더군요." 2008년 제대한 그는 폴라리스와 3년 전속 계약을 맺은 뒤 최근 두 번째 재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곳에서 처음 낸 6집(2008) 타이틀곡 '슬픔활용법'은 황찬희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후 '지나간다'(2010), '끝사랑'(2011) 등의 히트곡을 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보고싶다' 만큼 대박 난 앨범은 없지만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의 갈증이 해소됐다"며 "내 나이의 감성에 맞는 음악을 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카네기홀(2012), 호주 오페라하우스(2014)에서도 단독 공연을 열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쌓은 내공을 해외 무대에서도 펼쳐보였다. "카네기홀 공연이 '솔드 아웃' 됐는데 너무 감격스런 일이었어요. 제가 생각한 가수의 방향이 소박했기에 이런 권위있는 홀에서 공연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시 무대에 압도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그는 가수로서 가장 빛난 무대로 2011년 MBC TV '나는 가수다'를 꼽았다. 이때 남진의 '님과 함께'로 경연했는데 "지금껏 살면서 가장 김범수다운 만족스러운 무대"라고 말했다. 이 방송에서 파격적인 패션과 무대 연출을 선보이며 '비주얼 가수'란 수식어도 생겨났다. 그는 "이 무대는 내 음악 인생을 통째로 뒤집는 사건이었다"며 "객석에선 기립 박수를 보냈고 이 곡으로 음원차트 1위도 했는데 내 인생에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후 내가 가진 루저로서의 상처, 외모 열등감, 피해의식이 한꺼번에 치유됐다. 더는 '누가 못생겼다'고 해도 상처가 안 될 정도로 자존감이 높아진 계기였다.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웃었다. 그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인복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히트곡을 만들어준 윤일상을 비롯해 하광훈, 황찬희 등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가 마음속에 꼽는 여러 조력자 중 하나로 남동생도 꼽았다. 남동생은 현재 자신의 기획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동생은 처음에 이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왔죠. 애물단지가 될까 걱정했어요. 일부러 모른 척했는데 기특하게도 운전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지금은 매니지먼트 장이 됐어요. 이젠 동생 없이 일이 안될 정도로 제가 도움을 받는 위치가 됐죠." 아버지에 대한 뭉클함도 있다. 그는 "내가 말썽을 피우자 아버지에게 한밤중 팬티만 입고 왕복 4차선 도로로 쫓겨난 적도 있다"며 "가수의 길까지 반대하셔서 아버지와 불협화음이 있었다. 솔직히 싫어했다"고 고백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데뷔 때부터 제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걸 서랍에서 발견했어요. 아버지가 절 지지해준다는 걸 처음 느꼈죠.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은 연세가 든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요. 가끔 사우나도 같이 가는데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15년을 보낸 지금 그는 이승철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간간이 자작곡을 앨범에 실었지만 신승훈, 김동률 같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이미지는 빈약하다. 그는 "난 소리꾼이니 '소리로 끝까지 가자'는 생각은 확고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재 작업 중인 8집에서는 전곡을 공동 작곡하는 도전을 했다.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서다. "8집이 지금껏 들려준 음악과 변화가 커서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흥행에 성공 못 할 수도 있고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요. 대중이 제 얘기를 담은 앨범을 신선하게 받아들여 준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 같아요." 마침 인터뷰한 날은 같은 소속사 걸그룹으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레이디스코드의 멤버 고(故) 은비의 49재였다. 사실 그의 8집은 이 사고로 발매가 미뤄졌다. 그는 갑작스러운 아픔을 겪으며 가수로서 해야 할 목적이 하나 더 생겼다고 말했다. "이 친구들이 데뷔를 준비하며 고생한 걸 다 봤어요. 이제 시작인데 꿈이 꺾이니 혼란스럽더라고요. 이 친구들 몫까지 열심히 하는 게, 이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게 선배로서 제가 해야 할 역할인 것 같아요." 그렇기에 음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슈퍼스타K 6' 심사 때 재벌 2세로 태어나는 건 안 부럽지만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럽단 얘길 한 적이 있다"며 "그 어떤 부와 유산보다 음악적인 재능은 바꾸고 싶지 않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가수의 길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주위에서는 가수도 한때라며 '투잡' 하라는데 전 돈을 벌어도 어디에 투자한 것 없이 차곡 차고 모으는 스타일이죠. 다른 일로 스트레스받으면 노래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반감될 것 같아요. 노래만 할 수 있다면 조금 어려운 상황이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이다. 주위 친구들도 하나 둘 가정을 꾸렸다. 그는 그간 스캔들 한번 없이 사생활도 밋밋했다. "아직은 저를 확 줄이고 아내와 자녀로 제 생활을 채울 자신이 없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정을 꾸리면 그 소중함을 잘 아니까요. 나이에 쫓기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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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산증인' 103세 방지일 목사 별세한국 개신교 산증인 방지일 목사 별세 (서울=연합뉴스) 한국 개신교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방지일 서울 영등포교회 원로목사가 10일 새벽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3세. (연합뉴스 자료사진) 평양신학교 졸업후 20년간 중국 선교…일제 대동아선교회 가입 거부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한국 개신교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방지일 서울 영등포교회 원로목사가 10일 새벽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3세. 방 목사는 9일 오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이달 초 북한선교 기도회에 참석해 축사하는 등 고령에도 활동을 계속해왔다. 작년에는 한국 개신교 교단 연합 부활절 예배에 설교자로 나서기도 했다. 방 목사는 191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숭실대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신학교 재학 중에 평양대부흥운동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1937년 신학교 졸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7∼1957년 중국 산둥성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1957년 귀국해 영등포교회에 부임해 1979년까지 담임목사를 맡았다. 중국 선교사 시절 대동아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입을 강요하던 일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중국 당국은 1957년 그를 북한으로 추방하려고 했으나 중국에 남은 마지막 기독교 선교사라고 서방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장과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2010년부터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생명나눔 친선대사도 맡아왔다. 개신교 관계자는 "방 목사는 교파를 초월해 모두가 존경하는 한국 교회의 진정한 원로이자 생생한 교회 역사의 증인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