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고양문화재단 오페라 '나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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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고양문화재단 오페라 '나부코'

 

14136124262605.jpg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고민한 무대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배경 영상 속 잿빛 공장 굴뚝들 사이를 초록빛 나무들이 채웠다. 연출, 무대디자인, 영상, 조명, 의상의 색조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해소하고 조화에 도달한 4막 피날레 장면의 무대는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1년에 가까운 준비기간을 거친 고양문화재단(대표 안태경)과 대전예술의전당(관장 이용관) 공동제작 오페라 '나부코'(예술감독 정은숙, 프로듀서 안태경)가 16일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극과 음악 양면에 고심하고 공들인 흔적이 가득한 공연이었다.

 

장윤성이 지휘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박진감 넘치는 서곡은 오늘의 연주가 안정적이고 탄탄하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베르디 음악의 극적인 효과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끝까지 정확성과 응집력을 유지한 연주는 그 기대를 충족시켰다.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관객은 무대 막 위에 빠른 속도로 투사되었다가 사라지는 영문 문장들을 읽을 수 있다. 유대 민족과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적 사건들, 특히 충돌과 대립의 역사를 간결하게 열거한 문장들로, 2차 대전의 나치 학살과 최근의 가자지구 침공 등도 들어 있었다.

 

긴 역사를 통해 박해의 희생자이면서 이기적 침략자라는 이중성으로 세계인을 고민하게 해왔던 유대인. 이들을 베르디의 '나부코'라는 오페라에서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1 나타났다가 우수수 떨어지는 문장의 철자들은 연출가 김태형과 제작진의 이런 고심을 단적으로 드러낸 장치였다. 문장들을 한글로 썼더라면, 시각적 효과는 덜했을지 모르지만 더 많은 관객에게 연출의도를 수월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스라엘과 바빌로니아의 성격을 화/목/토 및 수/금이라는 오행(五行)의 요소들로 대비시킨 오윤균의 무대미술은 '나부코'의 극단적 대립과 결말의 화해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의 돌벽과 바빌로니아를 상징하는 무대 금속판의 질감이 이 대립을 대변했다. 박진원의 의상디자인은 자연의 빛깔을 닮은 이스라엘 의상과 문명의 화려함을 담은 바빌로니아 의상을 대비시켜 연출 및 무대의 기조와 조화를 이뤘다.

 

정확한 시대를 특정하지 않은 채 무대 장치나 소품, 의상 등에 여러 시대를 혼재시킨 것은 대조적인 두 문화의 특성들을 충분히 살리는 긍정적 효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기조가 된 산업혁명기에 초점을 맞춰 좀 더 통일성을 살렸더라면 어떨까 싶다.

 

파격적이면서도 작품 내용의 의미를 살리는 영상으로 관객에게 생각할 기회를 준 최원재의 영상디자인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유일신을 자처한 나부코에게 벼락이 떨어질 때 자만심 넘치는 문명을 상징한 거대한 철골구조가 배경화면에서 사라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대립적 요소를 강조한 우수정의 강렬한 조명과 임유경의 개성적이고 과감한 분장도 관객의 무대 몰입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성악적으로 급격한 음고차가 잦은 1막에서는 조금은 불안정한 고음이나 저음이 나오기도 했고, 오케스트라 총주를 뚫고 나와야 할 때 성악 솔로의 음량이 약간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을 몰입시키며 설득력 있는 가창을 선사했다.

 

나부코 역의 바리톤 김진추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섬세한 가창과 연기로 강한 군주의 면모, 딸에 대한 절절한 정을 지닌 아버지, 그리고 실성한 약자의 모습을 매순간 차별화해 표현하는 데 성공했고, 특히 서정적인 부분에서는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나부코의 큰딸 아비가일레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박현주는 드라마틱한 표현력으로 복수심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주인공을 탁월하게 표현해 관객들에게 가장 뜨거운 갈채를 받았으며, 히브리 대제사장 자카리아 역을 맡은 베이스 함석헌은 그 인물과 일체가 된 듯한 연기와 대담한 가창을 보여줬다.

 

페네나 역의 메조소프라노 추희명, 이스마엘레 역의 테너 윤병길, 그리고 조역 가수들과 고양시립합창단 모두 혼연일체가 돼 열정적인 가창을 들려주었다. 커튼콜 때는 다 함께 다시 한 번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을 노래해 관객들에게 그 장면의 감동을 되살려 주기도 했다.

 

다만 합창단의 얼굴이 모두 앳되어 극에 필요한 연륜과 고통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약간 부조화해 보였다.  

 

이번 공연은 특정 시대에 묶인 성경 오페라 '나부코'를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연출했다는 점, 출연진과 제작진이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해 앙상블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점, 그리고 국내 성악진과 연주자들 및 창작진만으로 뛰어난 수준의 공연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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