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본'·양金 있었고 개헌 외쳤던 87년…닮은듯 다른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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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양金 있었고 개헌 외쳤던 87년…닮은듯 다른꼴

아래로부터 분노 '거리 민심'이 제도권 이끄는 건 비슷
항쟁 이끈 野 거버넌스 있었지만 지금 野는 '동상이몽'
"당시는 개헌이 혁명적 구호, 지금 개헌은 논쟁거리"
6월 항쟁 이기고 87년 대선 野 분열 패배 경각심 대두

야권이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을 수습하기 위한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87년 6월 항쟁을 역사의 책장 속에서 꺼내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분노한 민심이 '광장의 에너지'로 분출된 87년 6월 항쟁과 현 시국이 닮은 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20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87년 6월 항쟁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거리로 나왔고,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 거리에 모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대적 환경과 현상이 발생한 배경이 다른 데다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야권 등 정치권이 요구받고 있는 해법에도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다.


또 야권은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민심 이반이 커지고 있지만 차기 대권이 넘어왔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6월 항쟁 당시에도 야권의 집권 가능성이 큰 가운데 분열로 정권을 놓쳤던 만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경계심이 높아가고 있다.


◇ 29년 만에 거리 메운 100만 군중…제도권 움직임 견인 = 6월 항쟁 당시 시청과 종로 등 서울 도심 일대에는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거리를 수시로 점령해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외쳤다. 부산과 광주 등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확산됐다.

학생들의 가두시위에 '넥타이 부대'가 가세하며 시위대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 등이 흘러나올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야권과 재야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광장에 모인 대중의 함성이 제도권의 변화를 이끌어낸 셈이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인 7월 9일에는 10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올해 촛불집회의 양상도 마찬가지다. 지난 12일 100만 명이 서울 도심에 몰려든 데 이어 19일에도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며, 제도권의 움직임을 견인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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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국본과 '양金'의 존재…2016년 강력한 야권 리더십의 부재 = 6월 항쟁 당시 재야와 야권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해 공동 대응을 해나가며 출발부터 야권의 역할이 컸지만, 이번 정국에서는 도도한 촛불 민심에 야권이 얹혀가는 형국이다.


특히 당시는 야권은 한목소리를 냈었다.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었던 김대중(DJ)·김영삼(YS의)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직선제 개헌'이라는 야권의 목표는 재야 및 시민사회와 일치했고, 방법론에서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야권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단일 리더가 부재한 채 7∼8명의 '잠룡' 집단이 존재하다 보니, 목소리가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제도권 야당과 시민사회를 묶는 단일 기구 구성을 놓고도 야당내 견해차이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최근 영수회담을 시도했던 것과 달리, 6월 항쟁 당시에는 YS가 영수회담을 제안했을 때는 야권과 재야에서는 큰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 등 야권의 대선주자 6인을 포함한 주요인사들이 20일 정국 수습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비상시국 정치회의'를 열기로 했지만, 야권을 모아낼 방안을 만들 지도 미지수다.


더구나 6월 항쟁 당시는 군사정권하에서 극단적 상황을 피하기 위한 해법을 극적으로 찾았지만, 현재는 청와대 및 친박(친박근혜)계와 광장의 목소리가 팽팽히 대립하면서 사태 장기화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독재 타도라는 민심이 표출하면서 '호헌'과 '개헌'이라는 전선으로 집약, 직선제 개헌 약속으로 출구가 열렸지만, 지금은 '하야·퇴진'이라는 슬로건으로 광장와 제도권의 목소리가 모이면서 야권의 목표치로만 따져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서지 않는 한 출구 찾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다. 정치적 절충 지점이 6월 항쟁 때보다 협소하다는 분석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야권이 광장 정치의 역할은 제한돼 있지만, 도리어 제도권 내에서의 역할은 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교수는 "야권이 시민사회에 기대지 않는 점을 감안할 때 합리적인 수습책을 모색할 수 있는 역할이 커졌다"면서 "6월 항쟁 때는 여권의 균열이 없었지만, 현재는 여권이 분열되고 있는 점도 야권으로서는 운신의 폭을 넓힐 것"이라고 말했다.


◇ 직선제 개헌 슬로건 아래 결집한 87년…지금 개헌 깃발? = 여야 모두 일각에선 6월 항쟁의 산물로 얻어진 직선제 개헌으로 탄생한 현행 헌법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순실 사태 또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비롯된 만큼 차제에 국가 운영의 판을 바꾸자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의 민심은 개헌을 외치지는 않고 있다. 개헌으로 출로를 여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야3당 지도부는 박 대통령의 퇴진에만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개헌을 꺼내들게 되면 퇴진 투쟁전선의 초점이 이동할 것이라는 경계심도 깔려 있다.


또 주요 야권 대선주자들이 개헌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고 있고, 게다가 개헌안에 대한 이견으로 현실적 제약이 있다.


87년 6월 항쟁때는 직선제 개헌 슬로건이 모든 저항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공통의 깃발이었지만, 지금 개헌은 내부 논쟁을 촉발시키는 는 뇌관이 되고 있는 셈이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전화통화에서 "개헌을 매개로 이 상황을 수습하는 의견도 정치권에서 힘을 얻지만, 광장에서는 우선 개헌을 방법론으로 삼기보다는 일단 박 대통령의 퇴진이 이뤄진 뒤 미래 권력을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 87년 직선제 개헌 쟁취하고도 분열한 野…경계심 대두 = 야권은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고 결국 YS와 DJ의 분열로 같은 해 말 대선에서 패배했다. 6월 항쟁의 결실을 허공에 날린 셈이다.


현 시국에서 야권에선 이에 대한 경각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야권 지도부에서도 이와 관련한 경고음이 공개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야당 지도부 간, 대선주자 간에 욕망의 충돌을 제어하고 통일된 수습책을 찾을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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