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일하고 뺨 맞아도'…참아야 하는 아파트경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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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일하고 뺨 맞아도'…참아야 하는 아파트경비원


14505824952109.jpg아파트 경비원연합뉴스TV 캡처

법적으로는 '경비' 일만…아직 현실은 '만능 서비스맨' 요구

"갑질문화보다 구조적 문제 더 심각"…고용 안정화가 해결 첫걸음

 

(서울=연합뉴스) 안홍석 설승은 기자 = #1. 이달 15일 밤 서울 서대문구 한 아파트 경비원 정모(79)씨는 여느 때처럼 경비실을 지키고 있었다.


별일 없이 일과를 마치려던 정씨의 작은 바람은 주민 조모(59)씨의 난동에 깨졌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조씨를 부축해 집에 데려다 주고 경비실로 돌아갔는데 조씨가 다시 내려와 느닷없이 자신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린 것이다. 조씨는 아예 경비실 안까지 들어와 전기난로를 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왜 나를 몰라보느냐"는 게 이유였다. 그는 "네가 뭔데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근무하느냐"며 폭언도 했다.


조씨는 폭행과 재물손괴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그러나 정씨는 조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2. 지난달 9일 정오께 경남 창원의 한 아파트 경비원 A(59)씨는 원칙대로 일했다가 오히려 억울한 일을 겪었다.


이 아파트는 출입카드를 소지해야 차량 차단기가 자동으로 열리지만, 입주민 B(43)씨가 차를 타고 들어서자 차단기가 열리지 않았다.


A씨가 "출입카드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자 B씨는 차에서 내려 A씨의 멱살을 잡고 어깨를 밀쳤다.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낸 관리비로 너 월급 받는 것 아니냐" 등 거친 말도 쏟아졌다.


B씨는 경찰 조사에서 "다른 경비원들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 차단기를 열어줬는데 A씨가 따지고 들어 순간 화가 났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파트 경비원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도 못하는 '약자' 신세를 여전히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압구정동 S아파트에서 입주민의 비인격적 대우를 견디지 못한 경비원이 분신해 숨지는 일이 벌어져 공분을 산 뒤에도, 경비원이 입주자로부터 폭언, 폭행을 당하는 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나모(64)씨는 "13년간 경비원으로 일했는데 우리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지위에 그렇게 큰 관심을 둔 건 S아파트 사건 때가 처음"이라며 "그때 '반짝'했을 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한 단계 낮은 사람'으로 보는 눈빛도 그대로다"라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파트 경비원의 처우가 '사각지대'에 놓인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이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나 열악한 근무환경을 조사하고 감독하는 기관이 없어서다.


그나마 시민·사회단체가 산발적으로 실태조사를 한다.


'시민과대안연구소'가 서울의 아파트 경비원 4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최근 발표한 '아파트 청소·경비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에서는 경비원의 열악한 처우가 잘 드러난다.


이들의 근무 환경은 격일제 24시간 근무 체제가 96.6%로 절대다수였다.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휴식 시간에는 업무 지시를 하지 못하게 돼 있으나, 응답자의 63.5%가 "휴식 시간에 일이 생기면 즉각 대처하고 있다"고 답했다.


별도의 휴식 공간이 없어 경비실에서 쉰다는 경비원도 57.8%였다.


연차 휴가가 보장되고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경비원은 36.5%에 불과했다. 5명 중 1명(22%)은 "아예 연차휴가가 없다"고 답했다.


22%는 입주민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욕설과 구타를 경험한 아파트 경비원도 4.4%나 됐다.


업무를 보다 다친 적이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산재보험이 아닌 본인 부담으로 치료한 경우는 72.1%에 달했다.

 

이처럼 아파트 경비원의 근무환경이 열악한 근본적인 이유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원은 근로기준법 63조 3호의 '감시(監視)' 근로자에 해당해 근로시간과 휴식, 휴일 등에서 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른 일반 근로자에 비해 노동력의 밀도가 낮고 신체적 피로나 정신적 긴장이 적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아파트 경비원들의 업무는 택배 수령·전달, 주변 청소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 입주민 민원처리 등 광범위하다. 입주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해결해야 하는 '만능 서비스맨'인 셈이다.


대부분이 55세 이상 고령자여서 기간제근로자보호법 적용을 못 받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 법은 고용한 지 2년이 지난 기간제근로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도록 규정했는데, 고령자는 제외된다.


보통 길게는 1년, 짧게는 3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하는 아파트 경비원들로서는 입주민 등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과도한 업무량과 열악한 근로환경에 시달려도 일자리를 잃을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의 원인을 그저 '갑질 문화'로 보는 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고용 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비인간적 대우는 습관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수영 변호사는 "몇몇 국회의원이 아파트 경비원에게 부당한 지시를 한 사람을 처벌하는 등의 법안을 냈으나, 일자리 문제 자체를 개선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고용이 안정돼야 경비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입주민의 존중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면서 "55세 이상도 기간제근로자보호법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제한 기준연령을 높이는 등 입법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성식 노원노동복지센터 센터장은 "감시 근로자로 계약할 수 있도록 노동지청에서 용역업체에 승인을 내줬으면, 실제로 경비 일만 하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감독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며 "승인 절차를 까다롭게 하던지 사후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센터장은 이어 "요즘 같은 연말이 계약 연장 기간이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입주민이 경비원을 하나의 노동자로 인정하도록 하려면 구조적인 문제부터 건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압구정동 아파트 사태가 집중 보도되면서 경비원들도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며 "인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사회가 실질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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