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프리미어12> 되돌아보는 영욕의 한·일 야구전쟁

기사입력 2015.11.07 10:20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14468591414153.jpg미국땅에 꽂은 태극기일본을 꺽고 4강에 진출한 한국대표팀 서재응이 1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 에인절 스타디움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뒤 웃고 있다./전수영/야구/2006.3.16(애너하임<캘리포니아주>=연합뉴스) swimer@yna.co.k<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삿포로=연합뉴스) 배진남 기자 = 숙명의 라이벌 한국과 일본 간의 야구전쟁이 8일 오후 7시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돔에서 다시 벌어진다.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 12 개막전에서다. 프로 선수들로 꾸린 한·일 국가대표팀 간 맞대결은 2009년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이후 6년 만이다.

     

    세계랭킹 상위 12개국이 기량을 겨루는 프리미어12의 첫 대회, 그것도 개막전 대진에 자리 잡았을 만큼 한국과 일본의 대결은 대내외적으로 관심이 많다. 물론 두 나라에 한·일전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한 경기 이상의 의미가 있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한 판이다.


    프로야구 출범이 우리보다 반세기 가량이나 앞선 일본야구는 역사나 인프라 등 여러 면에서 한국보다 객관적으로 한 수 위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태극전사들은 어느 종목이나 그렇듯 일본만 만나면 투혼을 불사르며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왔다.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극적인 3점 홈런으로 5-3 역전승을 거둔 것은 한·일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명승부다.


    한국야구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빠르게 성장하며 일본을 추격했다.


    1995년 '국보급 투수' 선동열을 신호탄으로 선수들의 일본 진출이 이어지면서 한·일 야구의 체감 거리도 점차 좁혀졌다.


    프로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과의 두 차례 예선경기에서 13-8, 9-2로 승리했고 결승에서 다시 만난 일본을 13-1, 7회 콜드게임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땄다.

    14468591446011.jpg<올림픽>이승엽 홈런이다(베이징=연합뉴스) 안정원 기자 = 22일 베이징 우커송 스포츠센터 야구장에서 열린 올림픽 야구 한국 대 일본전 8회말 1사 주자 1에서 이승엽이 역전 투런 홈런을 친 뒤 기뻐하고 있다. jeong@yna.co.kr (끝

    이를 포함해 1998년 이후 국제대회에서 일본과 상대전적은 19승 20패로 팽팽하게 맞섰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WBC, 야구월드컵 등 메이저 대회만 따지면 오히려 한국이 13승 7패로 앞선다.

     

    양국이 본격적인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한·일 드림팀'끼리 첫 맞대결로 기록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국은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예선에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7-6으로 승리한 한국은 다시 일본과 맞붙은 3·4위 결정전에서 구대성의 완투와 이승엽의 결승타로 3-1의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다.


    하지만 한국은 2003년 11월 일본 삿포로에서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해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때 왼손 투수 와다 쓰요시를 앞세운 일본에 0-2로 완패했다. 앞서 대만에도 덜미를 잡힌 한국은 올림픽 본선행이 좌절되는 쓴맛을 봤다. 한국야구사에 '삿포로 참사'로 쓰인 대목이다.


    이후 야구 최강국을 가릴 목적으로 2006년 WBC가 창설되면서 해외파와 국내파가 망라한 한·일 드림팀끼리의 대결이 잦아졌다.


    2006년 WBC 첫 대회를 앞두고 일본의 스타 스즈키 이치로는 "앞으로 30년간은 한국야구가 일본을 넘볼 수 없도록 해주겠다"라는 '독설'을 쏟아냈다.

    14468591469893.jpgR08085-드림팀 귀국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한 야구대표팀이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대현, 구대성, 이승엽 선수. 2000.9.29 <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그러나 한국은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일본에 3-2로 짜릿한 대역전극을 펼치며 조 1위로 당당히 본선에 나갔고,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2라운드에서도 2-1로 다시 일본을 눌렀다. 2라운드 승리 후 서재응이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던 장면은 한국 야구팬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비록 준결승에서 또 만난 일본에 0-6으로 무릎 꿇었지만 결국 초대 챔피언에 오른 일본의 자존심에 한국야구가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힌 대회였다.


    그러고서 한국야구는 가장 찬란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맞이한다.


    한국은 '일본 킬러' 김광현을 앞세워 사상 최고의 대표팀이라던 일본을 두 차례(예선 5-3 승, 준결승 6-2 승)나 꺾고 9전 전승의 믿기지 않는 성적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반면 일본은 노메달의 치욕을 당했다.


    2009년 열린 제2회 WBC에서는 이상한 대회 방식 때문에 한·일전이 무려 다섯 차례나 열렸다.


    한국이 결승에서 연장 10회 승부 끝에 일본에 3-5로 석패해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끝난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에 2승 3패의 성적을 거두며 결코 만만찮은 상대임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역대 한·일전에서는 구대성, 봉중근, 김광현 등이 맹활약하며 일본 킬러로 자리매김했다.


    타선에서는 이승엽이 '극일'(克日)에 앞장섰다. 이승엽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8회 2타점 2루타, 2006년 WBC 1라운드 8회 역전 2점 홈런,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 8회 투런포 등 여러차례 '8회의 기적'을 일구며 일본야구에 공포의 대상이 됐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