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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졸 출신 자동차 정비공의 보츠와나 진출 성공기

기사입력 2015.10.0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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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과 의형제 맺은 김채수 씨 "최고 컨설턴트 되겠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남아프리카공화국, 짐바브웨, 잠비아, 나미비아에 둘러싸인 아프리카 남부의 보츠와나공화국. 인구 215만 명 가운데 한인 130여 명이 사는 이 나라에 성공한 한인이 있다.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주인공은 1987년 이 나라에 진출해 28년째 거주하는 김채수(56) 한인회장. 그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그러나 자동차 정비 기술 하나로 이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대통령과도 의형제를 맺은 막역한 사이다. 4차례 한인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인물이 서울에 나타났다. 5일부터 서울 광진구 광장동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2015 세계한인회장대회에 참가했다. 8일 그를 만났다.


    노트북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있는데 그는 "보츠와나를 아프리카로 보지 마라. 유럽의 작고 깨끗한 나라로 보고 접근하라. 그래야, 일이 잘 풀린다"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작은 눈에서는 광선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곧이어 "'아프리카라서 못산다'는 선입견을 품고 보츠와나에 와서 사업을 하면 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전원이 들어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츠와나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칼라하리 사막은 초원으로 이뤄졌고, 이곳에서 기른 소는 육질이 좋아 전량 유럽으로 수출합니다. 또 다이아몬드는 세계 최대 매장량을 자랑해 1인당 국민소득이 8천 달러가 넘습니다. 아프리카 3위의 부국으로 꼽히는데, 실제 삶의 질은 아프리카 국민소득 1위의 적도기니와 2위 가봉보다 훨씬 높습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지난해 발표한 투자적합도 지수에서 1위를 차지했지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국가 중 하나입니다."


    "무슨 사막이라고 하셨죠?",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얼마나 되죠?" 등의 질문을 쏟아내자 "그런 것은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까 찾아서 쓰시라"라며 말을 잘랐다.


    지난달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회장 박기출)가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에 137번째 지회를 설립하는 안을 승인했을 때 취재를 위해 전화로 먼저 인사를 했다고 아는 척하자 그제야 명함을 기자에게 건넸다.


    대통령과 어떻게 의형제 사이가 됐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한인회장대회가 끝난 뒤 21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하는 이언 카마 대통령을 수행합니다. 보츠와나를 담당하는 주남아공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얼마 전 정식 요청을 받았죠. 카마 대통령이 부통령일 때부터 인연을 쌓았습니다. 가보로네에서 45㎞ 떨어진 곳에 노인 부부가 집 없이 나무 밑에서 살고 있었어요. 국회의장이 그 부부에게 집을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제게 말했죠. 이튿날 땅을 파서 집을 지었죠. 완공 후 입주 열쇠를 전달한 사람이 카마 부통령이었어요. 당시 부부의 팬티와 양말에서부터 주방기구, 커튼 등 생활용품 일체를 무료로 제공했고 열쇠 증정식에 입을 양복까지 맞춰줬어요. 그때 부통령은 '미스터 김은 '몽아또'(센트럴 지역의 사람)이고 나의 형제'라고 말하며 저를 포옹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그와 얼마나 각별한 사이일까?

    김 회장은 "이번 대회 참가를 위해 서울에 와 있는데 교통통신부 장관이 내게 전화를 직접 걸어와 '대통령 방한길에 나도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민원을 했다"고 웃으며 소개했다.


    지금은 웃는 얼굴로 자신 있게 성공담을 털어놓지만 그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는 9남매 중에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만주에서 부를 일군 거상(巨商)이었지만 전쟁통에 재산을 북한에 두고 남한에 내려오는 바람에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김 회장은 중학교 졸업만 하고 바로 상경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출판사에 잠깐 다녔어요. 그런데 과장·대리들이 월급날인데도 월급을 받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귀가하는 걸 보고 바로 뛰쳐나와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웠죠. 영등포 뒷골목 부품 가게에서 부품 수리를 시작했어요.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1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기술만 익혔죠.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시골 어머니에게 전부 보냈어요."


    일명 '밧데리가게'(카센터)에서도 일했다. 이곳에서는 창업을 목표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남의 가게지만 밤 12시 전에는 문을 닫지 않았다. 월급은 전부 적금에 넣었고, 오버타임으로 생기는 돈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돈이 모일 때쯤 어머니가 안구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했고, 가정 형편상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1천만 원이 넘는 적금 통장을 깨야만 했다.


    그는 당시 월 500만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준 주인에게 1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신뢰가 무너졌다는 생각에 군 입대를 택했다.


    학력 미달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지만 그는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자격증은 없지만 자동차 고치는 데는 자신이 있다. 대한 남아로 태어났는데 왜 못 가나. 가겠다"라고 우겼다고 한다. 군 복무를 하면서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제대 후 자격증을 내세워 버스회사인 '문화관광'에 정비과 주임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이 회사도 탐탁지 않았다.


    산업인력공단을 찾아가 정비 시험을 치렀고, 일주일 만에 합격 통지서와 함께 대우건설 보츠와나 현장으로 떠나라는 안내장을 받았다. 1987년 2월 난생처음 보츠와나 땅을 밟은 것이다.


    218㎞ 달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2년 만에 귀국했다. 그런데 남동생이 빚더미에 앉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돈만 생기면 가족에게 불행이 생기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동생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다시 빈손으로 보츠와나로 돌아갔다.


    "대우건설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렸다고 해서 갔어요. 3명이 동업했는데, 제가 갔을 때는 이미 관계가 깨진 상태였어요. 힘들었죠. 나중에 자동차 정비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끼리 또 뭉쳤는데 그것도 오래 못 갔어요."


    그에게 199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해이다. 어머니가 별세했고,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3개월 만에 결혼했으며, 가보로네에 '킴스 오토'란 이름의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렸기 때문이다.


    "보츠와나는 인구와 비교해 자동차 보유 대수가 우리나라보다 많아요. 우리는 과거에 부의 상징으로 차량을 소유했지만, 땅덩이가 넓은 이곳에서는 교통수단으로 차를 삽니다. 공무원이 되면 제일 먼저 차를 사는 나라입니다. 당연히 자동차 정비도 먹고살 만한 업종이죠."


    뛰어난 정비 기술에 힘입어 공장 운영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공장 안에 살림집을 차려놓고 밤낮없이 일했다. 그러나 학력이 짧아 배우지 못한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차만 고치면 되니까 영어가 필요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내는 영어 선생을 고용해 배웠고, 김 회장은 고객에게서 현장 영어를 익혔다. 술 한잔하면서 가상의 싸움을 하기도 하고, 정치를 논하면서 편을 갈라 이야기를 하면 친구와 고객이 "이럴 땐 이렇게 하라"라고 알려주는 형식이었다.


    "영어 문장을 달달 외워 손님이 오면 상황에 맞춰 사용했어요. 반응을 하면 '아, 맞는구나' 하고 다시 외우고. 그렇게 회화를 배웠어요. 마케팅은 기술이 좋으니까 자연히 되더라고요. 나중에는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손님이 끊이질 않았어요. 미리 부품을 받아 최대한 빨리 정비를 해줬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에서 출근 시간에 차를 맡겼다가 퇴근 시간에 찾아가는 정비소는 우리밖에 없었어요."


    고객이 늘어나면서 정비소 앞 땅을 사들여 판금공장까지 세웠다. 은행에서 공장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자금을 대줬다. 판금공장까지 가동하면서 사세는 팽창했다. 사고가 난 현장에 가장 빨리 달려가는 레커차를 만들어 운영도 했다. 경찰과 함께 사고 현장을 처리하고 사고 차량을 가져와 수리했다. 밤늦게까지 무전기를 들고 다니며 레커차 4대를 가동했다.


    사고 난 차량을 싸게 사서 고친 뒤 다시 판매하기도 했다. 뒷유리와 문짝에 '킴스 오토'라는 상호를 달았다. 지금 보츠와나 도로에는 그의 상호를 단 자동차가 수도 없이 달리고 있다. 영업이 잘되자 이를 시샘한 다른 정비소들이 '경찰들에게 돈을 주고 차량을 가져간다'며 그를 고발하기도 했다.


    자동차 부품 수입에도 손을 댔다. 수출 업무는 한국에 있는 동생이 맡았다. 동생이 당시 상공부로부터 수출탑을 받을 정도로 부품 수입업은 활기를 띠었다.


    월 1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자 한국인들이 '킴스 오토' 지사를 내겠다고 달려들었다. 많은 한국인이 보츠와나에 정착하기를 소망하던 그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가보로네 본사를 비롯해 지방에 4개 지사를 두게 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4개 지사가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겠다고 했다. 잘나가던 사업이 휘청할 정도였다. 정비 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업을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자살하고 싶었어요. 나는 왜 돈만 생기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놓은 인맥이 아까웠어요. 2개 지사와 레커차 등 돈 되는 것은 다 팔아 빚을 청산했어요. 나머지 2개 지사는 현지인 기술자에게 임대했어요. 지금 2개 지사는 엄청나게 잘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자동차 정비를 그만두고 컨설턴트가 됐다. 네오인포메이션 등 보츠와나에 진출한 기업 대부분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까지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과 한국인의 보츠와나 진출을 지원하는 것이다.


    김 회장은 14년째 '보츠와나 테니스 주니어 토너먼트 대회'를 주최한다. 또 축구 클럽에 '킴스 오토'를 새긴 유니폼을 무료로 지급해 주고 있다. 보육원과 불우이웃 등에도 아낌없이 후원금을 내놓는다. 이웃에 장례식이 생기면 트럭과 기사를 무료로 보내준다. '함께 살아가자'는 경영 철학 때문이다.


    1991년 그는 한인회를 만들었다. 경쟁업체 사장이자 친구를 회장에 추대하고 옆에서 봉사를 자처했다. 그러나 회원들이 자기 사업을 보호하려는 생각을 앞세워 한인회를 이용했기에 6년 만에 한인회는 문을 닫았다. 그러다 2000년 그는 다시 한인회를 창립했다. 2002년부터 2차례, 2011∼2013년, 그리고 올해까지 4차례 한인회장을 맡고 있다.


    '보츠와나에 빠진' 그는 형 김중수 가족, 동생 김장수 가족 등 10명을 불러들여 '킴스 패밀리'를 형성했다. 이들과 함께 자동차 정비, 건설업, 무역업, 컨설팅업을 하면서 보츠와나에 한국을 심고 있다.


    "보츠와나에 진출하고 싶은 분은 저와 상의하세요. 특히 젊은이들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제가 지식형 사업을 많이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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